프로젝트 소식

세계의 민주주의미얀마 난민 인권과 보건 문제 - 메타오 클리닉 | 김성민

1989년 한 아이가 태국 언저리 국경지역에 위치한 허름한 판자촌 건물에서 태어났다. 아이는 출생증명서도 없이 그렇게 태국 판자촌 주변에서 하루하루 허드레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가난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 아이는 자라면서 부모에게 배운 말과 동네에서 함께 뛰놀던 아이들의 말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네 친구들이 하나, 둘 학교에 가기 시작했지만, 그 아이는 그렇지 못했다. 부모는 늘 이른 아침 일터에 나가셔서 늦은 밤에나 들어왔으니 아이의 외로움도 커져갔다. 


하루는 아이의 부모가 아이에게 “너 이제부터 학교에 다녀라”라고 하셨다. 비록 2, 3년 늦은 진학이었지만, 일이 고단한 부모님이 출근을 하고 나면 집 혼자 남아야 해서 외롭고 지루했는데 학교에 갈 수 있게 되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학교에 가니 같은 말을 쓰는 또래의 친구가 많아져서 행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가끔씩 아플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아이가 태어난 판자촌이 있던 곳에 위치한 의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아이의 부모님도 때때로 의원에 진료를 받으러 가실 때면 따라가서 신나게 뛰어놀던 기억이 선명하다. 


의원은 진흙탕이 가득한 길바닥에 있었고 비록 아이와 부모님은 가난했지만 누구도 옷이 더럽다 하거나 진료비로 핀잔을 주거나 하지 않아서 주눅들 일이 없었다. 의원에 부모님이 입원을 할 때면 의원에서 나오는 따뜻한 밥과 함께 뛰어놀 아이들이 많았던 즐거운 기억도 선명하다. 의원에 있는 선생님들은 가끔 “아픈 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하셔서 싫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한 동네에 사는 이모, 삼촌들처럼 늘 아이를 예뻐해 주었다.


사춘기를 거치며 아이는 자신은 태국에 사는데, ‘태국인이 아니라’는 것과 ‘미얀마 사람의 삶이 태국인에 비해 각박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기 전에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자각이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지고는 했다. ‘나도 가난하게 살겠구나!’ 하는 걱정과 그런 걱정이 많았던 만큼 아이는 열과 성의를 다해 공부했다. 부모님이 늘 고단하게 일하시는 게 눈에 밟혔기에 ‘졸업 후에는 부모님에게 보답하고 싶다.’고 늘 생각하는 그런 착한 마음의 청년으로 성장해 갔다. 


다니던 학교에서 영어로 교육과정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 영어를 배우니 가끔 동네에 보이는 외국인들에게 길 안내도 할 수 있었고, 학업에 흥미가 더해졌다. 선생님은 “열심히 공부한 만큼 큰 보답이 있을 거라”며 격려해 주셨다. 노력에 보답을 받은 것인지 아이는 학교에서 제공해 주는 미국 검정고시 과정에도 통과할 수 있었고, 해외 대학 장학금의 기회까지 얻을 수 있었다. 


아이는 해외 대학에 진학해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도 사귀고 학업으로 견문을 넓히다 보니 ‘자신의 나라가 왜 가난했던 것인지, 부모님이 왜 외딴 태국에 정착했던 것인지’ 등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가난했지만 늘 무료로 치료와 교육을 받고 물심양면 도움을 받은 감사함에 “나도 향후에는 나와 같은 처지의 아이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아이는 대학을 졸업 후 자신이 태어난 의원에서 운영하는 본인이 졸업한 학교로 돌아와 교사로 후학을 양성하는 선생님이 되었다. 돌아와 활동해보니 비슷한 환경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대학 졸업 후 하나 둘 학업을 마치거나 사회 경험을 쌓고 돌아와 지역 내 난민, 이민자 관련 기관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아이가 태어난 의원은 미얀마 출신 이민자들에게는 꽤나 알려진 ‘메타오 클리닉’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메타오 클리닉’에서는 오늘 약 20명가량의 주임급 이상이 [성 착취 및 성적학대 예방 (Prevention of Sexual Exploitation and Abuse)에 관한 정책]을 토론했다. 클리닉 내에서 혹여 발생할 수 있는 업무 외의 ‘성범죄 예방 및 방지를 위한 정책’을 보다 지역과 문화적 특성에 맞춰 구체화하고 시행하기 위함이다. 


보통 클리닉에서 보완되어 사용되는 정책들은 국제기구 등의 정책을 참고로 한다. 태국과 미얀마 국경에 위치한 ‘난민 클리닉’이라고 불리는 ‘메타오 클리닉’이 이러한 정책을 논의하는 것은 지역 내 다채로운 활동을 펼치는 관련 단체와 협력 단체들이 ‘메타오 클리닉’의 정책과 행동지침 등을 많이 참고하여 실행하기 때문이다. 또한 350명 규모의 지역 단체에 불과한 ‘메타오 클리닉’이 이러한 정책을 선두 적으로 결정하고 실천하는 이유는 클리닉 대부분의 이용자가 정식 체류 증을 보유하지 않은 미얀마에서 건너 온 이민자 또는 노동자로서 태국에 거주하면서도 태국 법 밖에 있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메타오 클리닉’은 의료 서비스 향상을 위해 매년 시설 이용자 설문조사를 실시한다. 올해 결과에 따르면 설문에 응한 총 410명 중 59%에 해당하는 240명이 “어떠한 종류의 신분증도 보유하고 있지 않으며, 53%는 어떤 형태의 의료보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답하였다. 


절반 이상이 어떤 종류의 의료 보험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놀랍지만, 사실 이 비율은 2019년 “보험이 없다”고 대답한 78% (총 설문인원 459명)에 비해 상당히 줄어든 숫자이다. 사실 3년 간 혁신적인 제도 도입을 통한 보험 보유자가 증가하는 긍정적 변화가 있었다면 반길 일이었겠으나 사실 2020년 ‘4월 코로나 사태로 인한 국경 봉쇄’가 가장 큰 이유였다. 이는 2022년 12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평시 도보로 출퇴근이 가능했던 태국-미얀마 국경이 완전봉쇄 됨에 따라 양국의 자유로운 왕래가 거의 불가능한 만큼 태국 거주 미얀마 이민 노동자는 어떤 형태로든 정식 체류허가증을 취득하려고 노력한 탓이기도 했다. 사실 이들의 소득 수준은 매우 낮은 편이며 84%의 응답자가 “자신의 임금 수준이 최저임금인 월 약 30만원보다 낮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임금 수준이 낮고, 어떤 형태의 의료보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삶은 어떠할까? 여기에서 ‘메타오 클리닉’의 역할이 부각된다.


‘메타오 클리닉’은 끊임없는 내전과 정치 경제 환경의 불완전, 지속적인 피난민의 유입, 자금 운영난 등 여러 어려움 안에서도 이주민과 난민 사회에 긍정적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하고 있으며, 33년 간 약 1,800,000 건의 진료, 80,000 신생아의 출산 보조, 4,000명 가량의 의료진 배출과 연간 약 900명의 아동 교육사업과 2,000명의 아동을 보호해오고 있으며, 지역 내 기초 보건과 모자 보건 증진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모든 기초 서비스는 무료 또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제공되며 국경지역에서 법적, 사회적 보호와 사회보장제도의 사각제도에 놓여있는 이들에게는 마지막 보루로서 여겨지고 있다. 클리닉은 국경 지역에서 다음 세대 지도자를 발굴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역량 강화 사업도 펼치고 있으며 의료, 사회, 교육 환경 등의 문제를 환기시키며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메타오 클리닉’의 주요 사업으로는 1) 기초보건 사업 2) 의료진 훈련 3) 교육 및 아동 보호 4) 지역 보건 5) 조직의 지속가능성 6) 동부 미얀마 의료 시스템 강화가 있다. 이 사업들을 통해 ‘메타오 클리닉’은 더 많은 취약 계층, 피난민들을 돕고 있으며, 국경 지역 내 전염병 감시 및 확산 방지 활동에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모든 사업은 지역 내 여러 풀뿌리 단체, 국제 NGO, 정부 기관, 교육 기관 등과 유기적으로 연동하며 진행되고 있다.


‘메타오 클리닉’이 위치한 ‘메솟’과 주변 국가 및 도시 (Random Amplified Polymorphic DNA (RAPD) for differentiation between Thai and Myanmar strains of Wuchereria bancrofti - Scientific Figure on ResearchGate. Available from: https://www.researchgate.net/figure/Map-of-Thai-Myanmar-border-showing-the-study-areas-The-Thai-strain-of-W-bancrofti_fig1_6174934 [accessed 30 Dec, 2022] )

 

‘메타오 클리닉’은 의료 기관으로 정식 허가를 받은 단체가 아니다. 또한 모든 의료진이 의과 대한 또는 간호 대학을 나온 국가 공인 의료진이 아닌 ‘메타오 클리닉 자체 의료 훈련’을 받은 독특한 형태의 의료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인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안가는 형태의 의료행위가 타 국가에서 이뤄지고 있음에도 30년 이상 그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또 동 기간 태국 보건부, 지역 내 국립병원과 긴밀하게 협력하며 의료서비스를 제공해올 수 있었던 근간은 어디에 있을까?

 


‘메타오 클리닉’의 성장과정

  ‘메타오 클리닉’은 1989년 미얀마 8888사태로 군사정부를 피해 태국의 작은 국경 도시 메솟에서 미얀마 출신 의사 ‘신시아 마웅’과 마음이 맞는 몇 명의 청년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들은 잠시 거처를 마련하고, 전쟁 부상자를 돕고자 하는 역할로 ‘클리닉’을 시작한 것이다. 습하고 더운 아열대 기후, 진흙 길 비포장 도로, 그리고 허허벌판이었던 작은 태국 국경도시의 허름한 판자촌에서 ‘메타오 클리닉’ 의료진은 어떤 의료 장비도, 의약품도 없이 맨몸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종합병원에 후송하는 일로 밤낮없이 시간을 보냈다. 


긴급 산과 진료, 전쟁 부상자 수술 등 고급 의술이 필요한 경우는 클리닉 초창기부터 지속적으로 협력해 온 국립 종합병원으로 후송하여 치료가 제공 되고 있다. 클리닉에 시설장비가 없던 시기에는 의료 용품을 재활용하기 위해 압력밥솥을 이용하기도 해 때때로 그 때의 일이 회자되는 경우가 있다.

 

(위) 메타오 클리닉의 초기 모습 (아래)  2022년 현재 ‘메타오 클리닉’ (왼쪽부터 진녹색-외래 진료건물과 식당, 하얀색-본관, 연녹색-입원 환자 병동 건물, 우측 회색 지붕 건물-의료훈련 교실, 세미나실, 협력기관 사물실 등, 드론 샷)

 

치료를 마친 후 갈 곳을 잃은 미얀마 출신 젊은 청년들은 때론 클리닉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의료진의 노력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소리소문을 타고 국경지역에서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 하나 둘 찾아 들었고, 그러던 중 마음이 맞는 젊은이들이 “조금이나마 의료지식을 갖고 봉사 일을 하면 도움이 되겠다.”는 마음에 ‘기본 의료 교육, 간호, 경상/중상 관리 등의 훈련’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의료 훈련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태국과 동남아시아, 미주 대학교들과 협력하며 다양하고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메타오 클리닉’ 훈련과정은 [지역사회의 젊은이 양성 프로그램]으로 변모되고 있다. 의료 훈련으로 배출된 의료진은 ‘메타오 클리닉’ 또는 태국과 미얀마 내 소수민족 거주 지역에서 의료진으로 기초보건 활동을 활발히 진행 중이다.


‘메타오 클리닉’ 주변은 이렇게 태국으로 하나 둘 모여든 이주민, 난민 등이 함께 공동생활을 해가며 작은 마을로 성장해갔고, 타지에서 서로 돕고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정을 꾸리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 사이에서 새 생명이 한 명, 두 명 태어나며, 클리닉의 ‘모자보건과 소아과’도 중요한사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 매년 약 1,000명 이상의 신생아가 클리닉에서 출산 되고 있다. 대부분 피난민인지라 정식 체류 증을 보유하지 못했으니 태어난 아이들도 정식 신분증이 있을 리 만무했다. 따라서 아이들이 받을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 제한되었기에 대안이 시급했다. 클리닉은 4-5명의 학생을대상으로 시작하던 보육 프로그램을 1995년 ‘아동개발센터’라는 별칭으로 ‘이주민 교육센터’로 성장 시켰고, 현재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과정까지 1,000 명가량의 학생이 ‘아동개발센터’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 


현재 메솟 근방 이주민 교육 센터는 65개교로 약 11,000 가량의 이주민 아동에게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2008년 이후에는 태국 지방정부의 허가로 ‘메타오 클리닉’에서 태어난 모든 신생아가 출생증명서를 발급받게 되었다. 출생증명서를 통해 이주 아동들의 무국적 상황이 개선되었다. 2008년 이전 출생한 이들은 ‘메타오 클리닉’에서 발생한 신생아 기록을 통해 출생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는 방법도 인정되어 절차가 진행 중이다.


미얀마의 끊임없는 내전과 정치 경제 환경의 불안정, 지속적인 피난민 유입, 전염병 창궐과 계속된 자금 운영난 속에서 ‘메타오 클리닉’은 모든 인생을 바치고, 타인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그런 헌신적인 일꾼들에 의해 당당히 버티고 있다.

  

격변하는 미얀마 정세와 쿠데타, 그리고 인간 안보 (human security)

2021년 2월 발발한 미얀마 군사 쿠데타 이후 미얀마의 경제, 교육, 의료 등 기초 인프라 시설이 붕괴되고 있다. 의료 서비스의 붕괴와 더불어 살인, 부상, 감금 등 잔혹할 만한 군사 정부의 인권 탄압으로 현재 미얀마 내 사망률과 질병율은 심각한 수준이다. 더욱 참담한 현실은 악화되는 보건 상황에 대한 정확한 통계조차 없다는 것이다. 쿠데타 이후 사람들은 직장과 삶의 터전을 잃었고, 아이들은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없으며, 유엔세계식량계획과 국제사회는 미얀마 내 영양실조와 식량안보위협 증가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이는 향후 미얀마만의 당면한 문제가 아닌 주변국, 아세안 국가, 그리고 국제 안보의 차원에서도 큰 문제로 발전할 것이다.


2021년 쿠데타는 국제사회의 제재와 압박만을 초래한 것이 아닌 국가에 큰 저해를 가하고 있다. 국민 불복종운동 (civil disobedience movement)에 참여한 보건과 교육 종사자들, 군인, 공무원들도 피난 길에 올랐으며 약 15년 정도 클리닉과 태국에서 드물게 보았던 전쟁 부상자 (총상 및 지뢰 피해자), 말라리아 감염자들도 다시 목격되고 있다.


UN 인도지원조정실 (OCHA)의 2022년 12월자 [미얀마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최소 백사십만명이 실향민으로 살고 있으며, 그 중 백십만 명 이상이 2021년 쿠데타 이후 발생한 인원이다. 최근 지역 내 이해당사자 간담회에서는 비공식적으로 약 7,000명 이상의 ‘국민 불복종운동 참여자’가 태국 쪽으로 망명해 있다고 발표되었다. ‘메타오 클리닉의 신시아 원장’은 “현 상황이 마치 1988년 국경을 다시 보는 것 같다.”고 회상했다. 89년 당시에도 말라리아, 전쟁 부상자, 정신 건강 (치료)와 영양실조 환자가 주를 이뤘는데 그 현상이 2022년 다시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얀마 내 교육수준은 계속 낮아지고 있으며, 아동은 국경지역과 미얀마 내 지역을 막론하고 인신매매, 아동 노동, 무국적 문제 등에 가장 취약한 계층으로 노출되어 있다. 부모와의 이별, 사별, 또는 아동 유기 등과 더불어 적절한 교육과 보호의 부재로 인한 문제는 장래 사회 전체적으로도 큰 위협이 될 것이다.

 

세계로부터 잊혀진 곳, 태국-미얀마 국경지대

‘메타오 클리닉’이 위치한 태국-미얀마 국경지역은 70년이 넘는 민족 간의 분쟁으로 늘 피난민과 이주민이 피난 또는 이주해 왔다. 이 지역은 또한 약 10만 명가량의 난민을 수용하는 난민촌들과 새로 유입되는 이주노동자와 난민들로 태국-미얀마 언어, 문화, 경제가 뒤섞인 독특한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쿠데타 군사 정권에 맞서 싸우며 이 지역으로 넘어 온 이들의 삶은 녹록치 않다. 의사, 정치가, 고급 기술자, 변호사, 교사 등 미얀마 사회의 핵심 위치에 있던 이들도 태국에서는 공인 자격증도, 체류증도 없는 이방인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취업 허가증이 없어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이들은 좌절하지 않는 듯 보인다. 


이들은 행동한다. 재능 기부를 통해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 사업에 참여하거나, ‘메타오 클리닉’과 같이 의료진이 필요한 곳에도 그 재능을 기부하고 있다. 어떤 이는 ‘민간 반군사정부군’에 합류해 전쟁터로 돌아가기도 한다. 미래를 꿈꾸던 젊은이들은 낮은 곳에서 이름 하나 드러내지 않고, 조국의 민주화와 미래를 위해 싸우고 있다. 


국제기구를 통해 제3국 망명신청을 한 수백, 수천 명의 이들도 태국 국경지역 어딘 가에 흩어져 있다. 이들 또한 자신이 가진 거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입장이지만 그들의 상황도 여의치 않다. 왜냐하면 국제사회의 관심이 미군 철수 후 ‘아프가니스탄’으로 그리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돌아가다 보니 그들 또한 망명 신청 후 그저 무기한 대기 상태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삶의 영위조차 힘든 상황에서 이들에게 건강은 뒷전이 되기 일쑤이다. 또한 쿠데타 이후 미얀마 동북부의 소수민족 지역에는 장기간 이어 온 예방접종 사업이 전면 중단된 상황으로 현재 증가하는 ‘전쟁 부상자’, ‘말라리아’, ‘영양실조의 증가 추세’에 더해 보건 상황이 악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급변하는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메타오 클리닉’은 전략을 세우고 조직 강화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존의 접근 방식으로는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메타오 클리닉’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협력 단체와 새로운 재정 지원 경로를 물색하고 각 협력 단체와의 역할 분담과 조직 내 전략을 지속적으로 검토함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더욱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메타오 클리닉’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가 있는 한, 이곳 태국 국경지역에서 소외되고 도움이 필요한 이주민과 미얀마 난민들을 위한 역할을 수행해갈 것이다.


 

마치며 : 미얀마 그리고 한국

필자는 2016년 석사과정 중 인턴십 과정을 통해 메솟의 이주민, 난민과 미얀마 내 소수민족 상황을 알게 된 이후, 2017년 졸업과 함께 메솟으로 돌아와 ‘메타오 클리닉’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봉사였으나 오히려 배움이 컸고, 현지 동료들과, 국제봉사자들과, 협력 업체 동료들과 서로 협력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방안을 궁리하다 보니 어느새 ‘메타오 클리닉’의 직원으로 ‘후원금 조성 팀 부 관리자’로, 또 ‘관리자’로 지내며 약 6년 간 ‘메타오 클리닉’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길을 걸어가며 “한국인이 매우 소수만 거주하는 이 지역에서 내가 한국인으로서 현재 속한 기관과 지역에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 수 있을까?” 늘 고민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2022년 5월 ‘메타오 클리닉’ 신시아 원장이 수상한 [광주 인권 상]은 그 의미가 크다. 미얀마 인은 이 수상의 의미를 “한국 사회가 미얀마의 민주화를 응원한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고 김수환 추기경’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사단법인 바보의 나눔”도 ‘메타오 클리닉’의 아동 교육, 보호 사업을 2년 째 후원하고 있다. 


코로나 상황에서 아동 교육 사업이 존폐에 놓여있을 때, 사업 세부 내용이 보류되거나 변경되는 과정에서도 너그럽게 이해하고 지원해주어 아동 교육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었다. 메솟에 위치한 [한국-메솟 협력 센터 (Korea-Mae Sot Cooperation Center)]도 때로는 후원기관으로, 협력기관으로, 한국과의 교류를 잇는 다리역할로, ‘메타오 클리닉’을 물심양면 지원하고 있다. 한국-메솟 협력 센터는 향후 한국과의 다양한 교류를 통해 청년 교육 프로그램 등을 현지에 제공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이끌어 갈 인재양성을 더 큰 사업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이 밖에도 한국에서 개인, 단체, 종교, 교육관련 단체들이 메솟을 방문하고 있다. 앞으로 한국사회와의 연대와 교류가 확대되기를 희망한다.


‘신시아 원장’은 “국민 불복종운동 (civil disobedience movement)에 참여하고 있는 90년대 출생 젊은 의사와 간호사들도 미얀마 8888항쟁 (8888 uprising)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믿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2022년 현재 8888항쟁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실제 주위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나서야 군 정권 반대 운동에 더욱 적극적인 참여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대한민국 전역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같은 잔혹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미얀마에서는 그런 상상과도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미얀마 쿠데타 발발 후, 2015년 미얀마 내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믿었기에 미얀마로 본부와 사업을 이전했던 많은 국제기구와 NGO 단체가 다시 메솟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들은 미얀마의 정치적 환경변화를 긍정적으로 확대해석 한 결과 국경지역에서 5년, 10년의 활동을 종료한 후 미얀마로 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5년 이후도 또한 2017년 민주정권 이양 후에도 소수민족 지역, 시민사회 단체와 인권활동가 활동에 대한 미얀마 정부의 탄압은 지속적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메솟 거점 시민사회 단체는 미얀마에서 인도적 상황의 개선의 기미는 다소 보였으나 이러한 미미한 변화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안타깝지만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정부와 시민사회의 관계 회복은 상상 이상으로 긴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판단된다. 따라서 ‘메타오 클리닉’은 국경지역에 계속 남아 태국 시민사회 또는 정부와 협력해 나가며 양국 시민사회를 연결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쿠데타가 종결된다 해도 내전과 핍박으로 크게 피해를 입은 미얀마 정치, 경제, 인권, 언론, 사회 기반시설 등 거의 모든 분야의 재건에는 국제사회의 많은 협력과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메타오 클리닉’은 미얀마 내부로부터의 변화가 어려울지언정 외부에서의 변화의 불씨를 끄지 않기 위해 청년 리더 양성에도 만전을 기할 것이다. 필자는 ‘메타오 클리닉’의 일원으로서 계획한 사업이 충실히 실행될 수 있도록 ‘지금처럼 현지 동료들과 협조하며, 한국 시민 사회와의 강한 연대를 형성할 수 있는 교두보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바램 이다.


한국 사회는 미얀마와 닮은 부분이 많이 있다. 한국은 미얀마 같은 인종 간 분쟁 문제는 덜하지만 식민지와 군정을 거치고, 몇 번의 쿠데타와 잔혹한 인권탄압을 겪었다. 주변국과의 분쟁과 그 안에서 발생하는 강대국 간의 이권다툼에 설움을 겪기도 했다. 동포끼리 내전을 하며 ‘사상과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총칼을 겨누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고 미얀마 시민은 힘에 굴복하지 않고 늘 자유를 갈망하며 투쟁해왔다. 그 결과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으나 아직도 미얀마는 그렇지 못하다. 누군가는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염려할 때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투쟁하였기 때문에 얻은 결과가 우리를 민주주의로 또 경제 선진국의 반열에 들게 한 것이 아닐까? 


이 과정에서 우리는 배우고, 느끼고, 기록하고 또 회고하며, 잘못을 반성하고 반복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왔다. 그러니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을 비슷한 역사를 쓰고 있는 타 국가에게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국제 원조수혜국에서 공여국의 지위를 얻은 국가는 한국이 유일무이하다. 이제는 K-방역을 통해 한국이 한국만의 방식으로 세계에 표준을 제시하고, 선두에 설 자격이 있음을 증명했듯이, 원조공여 국으로서 약탈과 이익 추구만을 위한 원조가 아닌, 진정한 협력과 협조를 통해 새로운 한국만의 방식으로 미얀마 민주화의 길을 함께 걸어갈 방법을 논의해볼 시기가 아닌가 싶다.


[세계 민주인권을 보는 8개의 시선]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벌어지는 '민주주의와 인권 위기'를 목도하며 8명의 필자가 고민과 성찰을 나눕니다.

글 : 김성민 (태국-미얀마 국경지대 미얀마 공동체 병원 '메타오 클리닉' 스태프)

* 해당 원고의 의견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민주인권기념관의 공식 의견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