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소식

민주주의 에세이각자도생 서사 너머의 상상력이 필요해 | 위근우



2023년 4월, MBC <100분 토론> 1000회 특집에선 ‘토론하면 좋은 친구’라는 주제로 흥미로운 여론 조사를 실시했다.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과도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소위 정치적 양극화의 시대에 어울리는 회의적인 질문이었지만,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답변이 50퍼센트를 넘기며 예상보단 긍정적 결과가 나왔다.


물론 이 질문과 결과엔 여전히 모호한 맥락이 남는다. ‘친구’란 범주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누군가에게 친구란 상당히 폭넓고 유연한 개념일 수 있겠지만, 나처럼 사교성 없고 사적 영역을 좁게 잡는 사람에게 친구란 극소수다. 그러니 좀 더 느슨하면서도 유의미한 개념으로 번역이 필요해 보인다. 우리는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을 동료 시민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처음 질문보다 이것이 유용한 이유는 첫째, 친구라는 사적이고 주관적 범주보단 기준이 좀 더 명확하며, 둘째, 사실 우리의 정치에 필요한 건 서로 친구가 되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상호주관적 관계의 지위를 인정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시스템이라는 뜻이다. 나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이들을 동료 시민으로 인정할 수 없다면, 결국 가능한 건 그들의 목소리를 다수결로 지워버리는 것뿐이다. 지워져버린 소수파는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아닌 비국민으로 배제된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오직 소수라는 이유로 소외되는 민주주의란 형해화된 민주주의다. 이 글에서 다수결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서로 다른 정치적 의견이 공론의 순환 속에서 합리화의 압박을 받으며 합의에 이르는 심의 민주주의 시스템을 설명하려는 건 아니다. 그것은 하버마스 같은 이론가들이 훨씬 잘 설명해 줄 것이다.



더 나은 결과를 위한 협동적 태도가 필요하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민주주의의 주체로서 동료 시민들과 연결될 수 있는 문화적 배경에 대해서다. 우리가 함께 살고, 또한 주권자로서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 꼭 친구가 될 필요는 없다. 다만 호혜성 안에서 서로의 이기심을 조율하고, 서로에게 더 나은 결과를 위한 협동적 태도가 필요하다. 문제는 최근 한국의 여러 서사 장르에서 이러한 호혜적 관계를 무너뜨리는 각자도생 서사가 유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현시대의 무의식에 대한 반영일까, 자기실현적인 프로파간다일까. 무엇이든 좋은 신호는 아니다.


지난 몇 년 사이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끈 영상물들을 떠올려 보자. 2년 전 글로벌 시장에서 신드롬을 일으킨 <오징어게임>,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넷플릭스 K드라마 열풍을 잇는다고 평가받은 <지옥>, <지금 우리 학교는> 등의 장르 드라마에선 기본적으로 각자도생의 세계관을 제시한다. 목숨을 건 게임에서 445명의 도전자를 물리치고 홀로 생존해 456억을 받는 <오징어게임>, 유래를 알 수 없는 지옥의 사자들이 불특정 인물들을 처형하자 그것을 빌미로 사이비 교단이 세를 과시하고 대중은 거기에 굴종하는 <지옥>, 학교와 도시에서 좀비 사태가 벌어지자 오직 생존이 최우선 과제가 되는 <지금 우리 학교는>.


이들 작품은 각기 다른 설정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 문명사회의 법과 도덕이 통하지 않는 일종의 원초적 상황에 놓이게 될 때, 인간 각각은 약육강식의 논리를 내면화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이리라는 믿음. 인간이 절박해지면 자연스럽게 사회화된 가면을 벗고 바닥을 드러내 서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리라는 믿음.

하지만 이들 작품에서 마치 원초적 상태처럼 제시되는 서사적 배경이란, 실은 인간의 이기심과 나약함이 발현되도록 설계된 세계다. 그것은 원초적이지도 자연적이지도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이 호혜성에 기반한 소통과 협력을 포기하리라는 가정은 어딘가 의심스럽다. 인류의 역사엔 그 반대 가정에 대한 근거 역시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 작품이 현실 세계에 만연한 특유의 공정주의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재현한 것일 수도 있다. 공정주의 세계관은 이를테면 이렇다. 한정된 자원에서 내 몫을 얻는 방법은 온전히 공정한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뿐이다. 그로부터 도태된 이들은 제 몫을 얻지 못해도 어쩔 수 없으며, 사회적 책임이나 약자에 대한 배려를 요구하는 것은 떼쓰는 것으로 치부된다. 이러한 공정담론의 세계에 장르물의 필터를 씌우면 그대로 끔찍한 디스토피아가 된다. 문제는 이것이 현실에 대한 충분히 비판적인 전망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현실은 잔혹하다고 말할 뿐, 그 너머의 가능성을 모색하지 않을 때 문화적 내러티브는 더없이 무력해진다. 조너선 앨드리드의 <경제학은 어떻게 권력이 되었는가>(강주헌 역)의 한 문장을 인용하자면 “우리가 최악의 인간을 가정하면 그들도 우리의 암울한 기대치를 넘어서지 않는다.”


좀비와 지옥의 사자와 법이 미치지 않는 공간에서의 대규모 서바이벌 게임은 상상할 수 있어도 인간과 인간이 서로의 안전망이 되어줄 수 있는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한다면 여기에 어떤 효용이 있을까. 세상이 잔인할수록 그 너머 삶의 구체적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문화적 상상력의 효용이다.



민주주의란 ‘우리’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는 작업

많은 이들이 민주주의를 각 개인의 사적 이익 추구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해 주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 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각각의 이익이 충돌할 때, 힘이나 다수결의 논리가 아닌 정당성이 부각되기 위해선 논의와 협상의 합리성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그것은 정치에 대한 믿음인 동시에, 불특정 다수 동료 시민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주권 행사란 나의 권리 행사인 동시에 나 아닌 이들의 권리에 대한 존중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란 ‘우리’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는 작업이기도 하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포함한 ‘우리’ 안에서 어떻게 현명한 주권 행사가 가능할지 상상하는 것. 이런 상상을 제공하는 것이 사회적 각본으로서의 문화적 텍스트다. 갈등과 다툼만이 이 세상의 본질이자 영원한 굴레인 것처럼 말하는 대신, 수많은 부조리와 의구심 앞에서도 우리가 함께 앞으로 나아갈 어떤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것. 정치적 양극화의 시대, 각자도생의 시대, 불신의 시대에 맞서는 그런 상상력을 만나보고 싶다.


글 : 위근우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섣부른 타협보단 협업적 긴장관계가 공론장의 건강한 흐름을 만들어준다고 믿는다.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뾰족한 마음』 등을 썼다.


* 해당 원고의 의견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민주인권기념관의 공식 의견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