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7년의 러시아 수도에서 봄이나 여름에 찍혔다고 추정되는 사진 한 장이 있다. 이 사진에는 차르 전제정이 2월 혁명으로 무너지고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가 된 러시아에서 남녀 수백 명이 시위하는 장면이 담겨 있는데, 그들이 든 펼침막에는 “팁을 없애라!”고 적혀 있다.
인간의 권리를 쟁취하려는 민중이 떨쳐 일어난 사건, 러시아 혁명
팁은 식당이나 찻집에서 손님이 자기가 먹은 음식의 값을 내고 시중드는 종업원에게 조금 더 주는 웃돈을 말한다. 사진 속 시위대는 음식점의 서빙 노동자들이다. ‘팁을 받으면 좋지, 왜 팁을 없애라고 하지?’라는 궁금함은 그 옆의 다른 펼침막에 적힌 구호를 보면 풀린다.
“우리는 서빙 노동자를 인간으로 존중하기를 요구한다!”

팁을 주는 이와 팁을 받는 이는 철저한 갑을 관계이므로 동등한 권력관계에 있지 않고, 따라서 손님을 접대하는 서빙 노동자가 손님에게 사람대접받지 못하기 일쑤였다. 사진에 찍힌 이들이 바라는 바는 인간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팁이 아닌 정당한 보수를 받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이처럼 인간의 권리를 쟁취하려는 풀뿌리 민중이 떨쳐 일어난 사건이 러시아 혁명이었다. 쉽게 잊히는 역사의 진실이 하나 있는데, 그 진실이란 바로 1917년 러시아 혁명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의 가치를 뒤엎으려는 움직임이 아니라 오히려 프랑스 혁명이 못다 이룬 가치를 마저 완성하려는 움직임이었다는 사실이다.
현대의 ‘인권’ 개념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이 갓난아기가 뗀 첫걸음이 신민(臣民)이 아닌 시민(市民)에게는 “자연적이고 양도할 수 없으며 신성한 인간의 권리”가 있음을 밝히는 <인권선언>이었다. 이 인권이 자유와 평등을 통해 확보되리라고 믿음은 18세기 프랑스의 혁명가 사이에서 상식이었다. 그러나 평등의 가치가 자유의 가치에 밀려 버림받은 19세기에는 자유조차 알맹이 없는 껍데기가 되고 말았다. 자유를 완성하기 위해서라도 평등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마침내 20세기 초엽에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졌다.
1917년 10월에 혁명 러시아의 집권 세력이 된 볼셰비키 정권 아래서 인권의 가치가 현실로 선언되는 진보가 이루어졌다. 피억압민의 해방이 선언되었고, 8시간 노동제가 도입되었고, 남녀평등이 실행되어 여성이 가부장제에서 풀려나 투표권을 얻었고, 소수민족의 권리를 보장하는 민족자결주의가 천명되었다. 18세기에 프랑스 혁명으로 태어났지만 19세기에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았던 ‘인권’이라는 어린이가 20세기에 러시아 혁명으로 훌쩍 자라 어엿한 어른이 됐다고 보였다. 그러나 역사의 도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성토의 대상이던 관행이 슬그머니 되살아난 소련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한 혁명 러시아의 앞에는 꽃길보다는 가시밭길이 펼쳐져 있었다. 혁명을 지키려는 힘과 무너뜨리려는 힘이 맞부딪치면서 1918년부터 피어오른 내전의 불길이 세 해 동안 활활 타오르면서 피바람이 불었다. 애초의 바람과는 어긋나게도 혁명의 확산은커녕 내전과 국제적 고립을 맞이한 볼셰비키당에게는 반(反) 혁명과 싸워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해방의 기쁨을 잠시 맛본 저 사진 속의 서빙 노동자들도 내전기 경제 파국의 와중에 인권보다는 생존을 위해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반혁명과 사투를 벌이며 생존에 급급한 사이에 지난날 성토의 대상이었던 관행이 슬그머니 하나하나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던 목소리가 생산량과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는 구호에 짓눌려 잦아들었다. 여성 해방을 꿈꾸던 여성이 험한 세상에서 그나마 최소한의 보호를 해줄 남성을 찾아 숨 막히는 가부장제 가정으로 도로 들어가야 했다. 병사들에게 장교와 동등한 지위를 보장해 주었던 병사 위원회가 힘을 잃고 제정 시절 군대와 다를 바 없는 철저한 상명하복의 규율이 ‘붉은 군대’의 구호가 되었다.
‘민족들의 감옥’이라고 불리던 러시아 제국의 족쇄에서 풀려난 여러 소수민족에게 중앙정부의 의사가 다시 강요되었다. 전제정을 수호하는 비밀경찰의 탄압과 고문에 시달렸던 볼셰비키가 ‘체카’라는 새 비밀경찰을 만들어서 반대파를 탄압하고 고문했다. 볼셰비키 정권이 지난날 차르 전제정권과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이 터져 나왔다. 이 같은 비판의 절정이 1921년 초봄 크론시타트 해군 병사들의 봉기였다. 볼셰비키의 가장 강력한 지지 세력이었던 해군 병사들은 인민의 해방과 시민의 권리를 실현하겠다던 1917년의 약속을 지키라고 외쳤다. 그러나 피비린내 나는 세 해 동안의 내전에서 ‘불의 세례’를 거친 볼셰비키당은 귀를 틀어막은 채 크론시타트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러시아 혁명은 왜 변질되었을까?
한동안 핀란드만에는 해군 병사들의 주검이 둥둥 떠다녔다. 살아남은 혁명 러시아의 최고 권력은 1929년에 ‘강철의 사나이’, 즉 스탈린의 손에 쥐어졌다. 자본주의 열강을 추월해야 한다는 스탈린의 지침 아래 5개년 계획과 농업집단화 정책이 강행되었고, 1936년에는 사회주의의 최종 승리를 선언하며 시민의 완전한 권리를 재천명하는 스탈린 헌법이 선포되었다.
한편, 1936년은 대숙청의 해이기도 했다. 혁명 러시아의 후신인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즉 소련의 드넓은 영토 곳곳에 인권이 철저히 유린당하는 강제수용소가 들어섰다. 일반 시민 1억 9천만 명이 권력의 눈치를 살피며 숨죽이는 가운데 수천만 명의 인권이 처절하게 짓밟혔다. 스탈린 헌법에 적혀 있는 인권 조항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프랑스 혁명에서 시민의 권리가 완전하게 보장된 때가 다름 아닌 자코뱅 공포정치 시기였다는 역사의 역설이 러시아 혁명에서도 되풀이된 셈이다. 의문이 떠오른다. 러시아 혁명은 왜 변질되었을까?
이 변질은 혁명 지도자의 개성 탓만은 아니었다. 혁명을 이끈 최고 지도자 레닌은 권위와는 거리가 먼 참으로 소박한 사람이었다. 뒤를 이어 최고 권력자가 된 스탈린이라는 개인의 성품 하나만으로 1930년대의 광풍이 설명될 수는 없다. 혁명 지도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의 논리를 내세웠다. 나라 안팎에서 반혁명과 제국주의가 혁명의 목을 조여 죽이려 드는 절체절명의 악조건 아래서 민주주의의 이상과 인권의 가치는 먼 훗날 실현해야 할 목표로 혁명의 생존이라는 당장의 가치 뒷전에 놓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일리가 없지는 않다. 어쨌든 혁명의 생존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볼셰비키는 나름대로 훌륭한 혁명가였다.
역사의 진보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은 필수적 가치이다
그러나 인권의 실현이라는 면에서 그들은 실패했다. 그들이 내세운 상황 요인이 그 실패를 정당화해 주지는 않는다. 볼셰비키 지도부 앞에는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갈래 길이 있었다. 그들이 그 여러 길 가운데 혁명의 생존을 위해서라며 억압의 길로 들어선 선택에는 그들의 이념과 사고방식 속에 내재한 권위주의가 작용했다. 권위주의는 민주적 가치의 억압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권위주의가 지닌 위험성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혁명가들은 혁명의 생존은 얻어냈지만, 그 생존은 민주적 가치를 희생하고 얻은 상처뿐인 승리였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희생된 그 민주적 가치에는 인권도 들어있었다.
혁명의 생존을 위해 인권을 희생하는 혁명 정부에 실망한 풀뿌리 민중은 혁명에 등을 돌렸고, 그 탓에 프랑스 혁명의 가치를 계승한다던 러시아 혁명의 결과물인 소비에트 연방은 70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러시아의 혁명가들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치켜들었다면, 20세기의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역사의 진보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은 선택적 가치가 아니라 필수적 가치인 셈이다.
글 : 류한수
역사학자. 러시아 혁명과 제2차 세계대전 등 20세기 현대사의 주제를 주로 연구한다. 『러시아의 민족 정책과 역사학』을 썼고, 『이콘과 도끼: 해석 위주의 러시아 문화사』, 『유럽 1914~1949: 죽다 겨우 살아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을 번역했다.
* 해당 원고의 의견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민주인권기념관의 공식 의견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1917년의 러시아 수도에서 봄이나 여름에 찍혔다고 추정되는 사진 한 장이 있다. 이 사진에는 차르 전제정이 2월 혁명으로 무너지고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가 된 러시아에서 남녀 수백 명이 시위하는 장면이 담겨 있는데, 그들이 든 펼침막에는 “팁을 없애라!”고 적혀 있다.
인간의 권리를 쟁취하려는 민중이 떨쳐 일어난 사건, 러시아 혁명
팁은 식당이나 찻집에서 손님이 자기가 먹은 음식의 값을 내고 시중드는 종업원에게 조금 더 주는 웃돈을 말한다. 사진 속 시위대는 음식점의 서빙 노동자들이다. ‘팁을 받으면 좋지, 왜 팁을 없애라고 하지?’라는 궁금함은 그 옆의 다른 펼침막에 적힌 구호를 보면 풀린다.
“우리는 서빙 노동자를 인간으로 존중하기를 요구한다!”
팁을 주는 이와 팁을 받는 이는 철저한 갑을 관계이므로 동등한 권력관계에 있지 않고, 따라서 손님을 접대하는 서빙 노동자가 손님에게 사람대접받지 못하기 일쑤였다. 사진에 찍힌 이들이 바라는 바는 인간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팁이 아닌 정당한 보수를 받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이처럼 인간의 권리를 쟁취하려는 풀뿌리 민중이 떨쳐 일어난 사건이 러시아 혁명이었다. 쉽게 잊히는 역사의 진실이 하나 있는데, 그 진실이란 바로 1917년 러시아 혁명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의 가치를 뒤엎으려는 움직임이 아니라 오히려 프랑스 혁명이 못다 이룬 가치를 마저 완성하려는 움직임이었다는 사실이다.
현대의 ‘인권’ 개념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이 갓난아기가 뗀 첫걸음이 신민(臣民)이 아닌 시민(市民)에게는 “자연적이고 양도할 수 없으며 신성한 인간의 권리”가 있음을 밝히는 <인권선언>이었다. 이 인권이 자유와 평등을 통해 확보되리라고 믿음은 18세기 프랑스의 혁명가 사이에서 상식이었다. 그러나 평등의 가치가 자유의 가치에 밀려 버림받은 19세기에는 자유조차 알맹이 없는 껍데기가 되고 말았다. 자유를 완성하기 위해서라도 평등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마침내 20세기 초엽에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졌다.
1917년 10월에 혁명 러시아의 집권 세력이 된 볼셰비키 정권 아래서 인권의 가치가 현실로 선언되는 진보가 이루어졌다. 피억압민의 해방이 선언되었고, 8시간 노동제가 도입되었고, 남녀평등이 실행되어 여성이 가부장제에서 풀려나 투표권을 얻었고, 소수민족의 권리를 보장하는 민족자결주의가 천명되었다. 18세기에 프랑스 혁명으로 태어났지만 19세기에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았던 ‘인권’이라는 어린이가 20세기에 러시아 혁명으로 훌쩍 자라 어엿한 어른이 됐다고 보였다. 그러나 역사의 도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성토의 대상이던 관행이 슬그머니 되살아난 소련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한 혁명 러시아의 앞에는 꽃길보다는 가시밭길이 펼쳐져 있었다. 혁명을 지키려는 힘과 무너뜨리려는 힘이 맞부딪치면서 1918년부터 피어오른 내전의 불길이 세 해 동안 활활 타오르면서 피바람이 불었다. 애초의 바람과는 어긋나게도 혁명의 확산은커녕 내전과 국제적 고립을 맞이한 볼셰비키당에게는 반(反) 혁명과 싸워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해방의 기쁨을 잠시 맛본 저 사진 속의 서빙 노동자들도 내전기 경제 파국의 와중에 인권보다는 생존을 위해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반혁명과 사투를 벌이며 생존에 급급한 사이에 지난날 성토의 대상이었던 관행이 슬그머니 하나하나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던 목소리가 생산량과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는 구호에 짓눌려 잦아들었다. 여성 해방을 꿈꾸던 여성이 험한 세상에서 그나마 최소한의 보호를 해줄 남성을 찾아 숨 막히는 가부장제 가정으로 도로 들어가야 했다. 병사들에게 장교와 동등한 지위를 보장해 주었던 병사 위원회가 힘을 잃고 제정 시절 군대와 다를 바 없는 철저한 상명하복의 규율이 ‘붉은 군대’의 구호가 되었다.
‘민족들의 감옥’이라고 불리던 러시아 제국의 족쇄에서 풀려난 여러 소수민족에게 중앙정부의 의사가 다시 강요되었다. 전제정을 수호하는 비밀경찰의 탄압과 고문에 시달렸던 볼셰비키가 ‘체카’라는 새 비밀경찰을 만들어서 반대파를 탄압하고 고문했다. 볼셰비키 정권이 지난날 차르 전제정권과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이 터져 나왔다. 이 같은 비판의 절정이 1921년 초봄 크론시타트 해군 병사들의 봉기였다. 볼셰비키의 가장 강력한 지지 세력이었던 해군 병사들은 인민의 해방과 시민의 권리를 실현하겠다던 1917년의 약속을 지키라고 외쳤다. 그러나 피비린내 나는 세 해 동안의 내전에서 ‘불의 세례’를 거친 볼셰비키당은 귀를 틀어막은 채 크론시타트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러시아 혁명은 왜 변질되었을까?
한동안 핀란드만에는 해군 병사들의 주검이 둥둥 떠다녔다. 살아남은 혁명 러시아의 최고 권력은 1929년에 ‘강철의 사나이’, 즉 스탈린의 손에 쥐어졌다. 자본주의 열강을 추월해야 한다는 스탈린의 지침 아래 5개년 계획과 농업집단화 정책이 강행되었고, 1936년에는 사회주의의 최종 승리를 선언하며 시민의 완전한 권리를 재천명하는 스탈린 헌법이 선포되었다.
한편, 1936년은 대숙청의 해이기도 했다. 혁명 러시아의 후신인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즉 소련의 드넓은 영토 곳곳에 인권이 철저히 유린당하는 강제수용소가 들어섰다. 일반 시민 1억 9천만 명이 권력의 눈치를 살피며 숨죽이는 가운데 수천만 명의 인권이 처절하게 짓밟혔다. 스탈린 헌법에 적혀 있는 인권 조항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프랑스 혁명에서 시민의 권리가 완전하게 보장된 때가 다름 아닌 자코뱅 공포정치 시기였다는 역사의 역설이 러시아 혁명에서도 되풀이된 셈이다. 의문이 떠오른다. 러시아 혁명은 왜 변질되었을까?
이 변질은 혁명 지도자의 개성 탓만은 아니었다. 혁명을 이끈 최고 지도자 레닌은 권위와는 거리가 먼 참으로 소박한 사람이었다. 뒤를 이어 최고 권력자가 된 스탈린이라는 개인의 성품 하나만으로 1930년대의 광풍이 설명될 수는 없다. 혁명 지도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의 논리를 내세웠다. 나라 안팎에서 반혁명과 제국주의가 혁명의 목을 조여 죽이려 드는 절체절명의 악조건 아래서 민주주의의 이상과 인권의 가치는 먼 훗날 실현해야 할 목표로 혁명의 생존이라는 당장의 가치 뒷전에 놓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일리가 없지는 않다. 어쨌든 혁명의 생존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볼셰비키는 나름대로 훌륭한 혁명가였다.
역사의 진보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은 필수적 가치이다
그러나 인권의 실현이라는 면에서 그들은 실패했다. 그들이 내세운 상황 요인이 그 실패를 정당화해 주지는 않는다. 볼셰비키 지도부 앞에는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갈래 길이 있었다. 그들이 그 여러 길 가운데 혁명의 생존을 위해서라며 억압의 길로 들어선 선택에는 그들의 이념과 사고방식 속에 내재한 권위주의가 작용했다. 권위주의는 민주적 가치의 억압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권위주의가 지닌 위험성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혁명가들은 혁명의 생존은 얻어냈지만, 그 생존은 민주적 가치를 희생하고 얻은 상처뿐인 승리였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희생된 그 민주적 가치에는 인권도 들어있었다.
혁명의 생존을 위해 인권을 희생하는 혁명 정부에 실망한 풀뿌리 민중은 혁명에 등을 돌렸고, 그 탓에 프랑스 혁명의 가치를 계승한다던 러시아 혁명의 결과물인 소비에트 연방은 70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러시아의 혁명가들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치켜들었다면, 20세기의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역사의 진보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은 선택적 가치가 아니라 필수적 가치인 셈이다.
글 : 류한수
역사학자. 러시아 혁명과 제2차 세계대전 등 20세기 현대사의 주제를 주로 연구한다. 『러시아의 민족 정책과 역사학』을 썼고, 『이콘과 도끼: 해석 위주의 러시아 문화사』, 『유럽 1914~1949: 죽다 겨우 살아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을 번역했다.
* 해당 원고의 의견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민주인권기념관의 공식 의견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