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지금 파주시 주민이다. 우연히 들렀던 마을이 마음에 들어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경기도민이 되었다.
서울 집을 정리하고 파주에 오면서 내가 고른 집은 2000년도에 지어진 노인복지주택이었다. 이제는 규제가 풀린 오래된 공동주택은 저층이면서 휠체어가 지날 수 있는 넓은 복도와 승강기가 있다는 특징이 있다. 따로 공원이 필요 없을 정도로 곳곳에 산책로가 많고, 요즘은 정미소 옆 철새도래지에 온다는 흑두루미를 볼 날을 기다리고 있다.
병원 키오스크 앞에서 당황하는 노인의 모습이 떠오르다
많은 사람이 내 결정이 충동적이라고 했고 나도 문득 자신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복잡한 서울을 떠나 한가한 곳으로 거처를 옮기고 싶은 마음이 낯선 마을로 날 안내했다. 지금도 내 선택을 언제쯤 후회할지 궁금하다.
이삿짐을 정리하고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창공을 가로지르는 기러기 떼를 보았다. 볼록하고 귀여운 배를 보이며 떼를 지어 차례로 비행에 나선 그들을 보면서 서울살이를 고집했다면 볼 수 없는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40분에 한 대씩 지나가는 마을버스를 놓치지 않으려 동동대며 보내고, 고작 하루 도시가스가 연결되지 않았을 뿐인데 전에 없던 불편을 겪으면서 얼마나 게으른 문명인이 되었는지 실감했다. 주민센터는 모두 집 근처에 있는 줄 알았는데 읍내까지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제서야 내가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서 살다 왔음을 깨달았다.
전입 신고하러 읍내에 있는 주민센터를 찾았을 때 일이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에게 무상 마스크 중복 수령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자신의 마스크를 단단하게 고쳐 쓰는 주민센터 공무원의 모습을 보았다. 성매매 여성들의 일터를 철거해 더 좋은 생활환경을 만들자는 데 동의를 구하는 전단이 비치되어 있었다. 철거에 관한 입장이 한쪽으로 치우친 내용에 나는 동의하기 힘들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40분 동안 기다리며 나는 급할 게 없는 한량처럼 쏘다니다가 목이 늘어진 양말처럼 앉아 읍내 풍경을 관찰했다. 전입신고를 위해 하루 반나절을 쓰고 느낀 사실은, 누군가에겐 하루 반나절이 걸리는 일이 온라인으로는 3분이면 끝난다는 거였다. 병원 키오스크 앞에서 당황하는 노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노년을 맞이할 내가 바람이 있다면 앞으로 더 많은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것이다
파주에 있는 면 소재지의 작은 마을에 와 처음 한 일은 동네 작은도서관을 찾는 것이었다. 마을에 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핸드폰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서관을 검색했다. 대중교통 생활자에게 불편한 마을에 살지만, 나는 운전조차 불가능하다.
도보로 걸어갈 만한 거리에 위치한 작은도서관을 찾았다. 감색 벽돌이 예쁜 담장을 이루고 있는 작은도서관에서 두 달째 주민들과 글공부를 하고 있다. 내가 이곳에 와 한 일 중 가장 낭만적인 일이라고 자부한다. 모임을 이끄는 사람이 되고 ‘작가님’이라는 호칭이 붙지만, 내 능력이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칠 정도는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내가 잘하는 거라고는 뻔뻔하게 시작한 일에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것뿐이다.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 날, 도서관에 앉아 사람들과 장애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다. 창밖으로 소복하게 눈이 내리고, 마을회관 앞에 일렬로 주차된 바퀴 달린 유모차형 장바구니들이 보였다. 노인정이 있는 마을회관을 돌면 철새도래지 앞 국숫집에서 인심 좋은 주인장이 말아주는 양 많은 잔치국수에 낮술을 곁들이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의 모든 풍경이 낭만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차선 도로 중앙선에 서 있는 노인들을 볼 때면 마음이 서늘하다. 날씨에 비해 얇은 실내복 차림으로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방금 나선 자신의 집을 찾지 못하는 듯 보인다. 목줄을 달고 길을 헤매는 유기견을 볼 때도 마음에서 찬바람이 분다.
나는 이제 이곳에서 노년을 맞이할 것이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마을회관 옆 도서관에서 사람들과 글공부하는 시간이 앞으로도 오래 지속되어, 이곳의 사람들과 더 많은 관계를 만들어 가면 좋겠다. 내가 어느 날 현관 비밀번호와 사는 집 호수를 잊어버리고 맨발로 중앙선 위에 서 있는 날이 온다면 누군가가 나를 찾아주길 바란다. 그 순간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더없이 고마울 텐데.
그래서 나는 작은도서관이 소중하다.
길 위의 생명은 동물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도 포함되어 있다
속내를 감춘 듯 보이지만 그 자체가 실체인 안개처럼 뿌연 투명함을 지닌 도시 파주. 내겐 너무 과분한 절경을 보여주고 가끔 우울을 조심하라고 말해주는 풍경들. 과소비를 자책하는 내게, 이곳에 온 것을 그간 고생한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여기라는 친구의 말에 울컥했다. 운 좋게 대강 살아온 나에게 차고 넘치는 칭찬 같아서 부끄럽지만.
이사를 결심하기 전, 딱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바로 도로 위 죽은 동물들을 보는 괴로움이다. 이곳에서는 교통사고로 죽은 동물들을 간혹 목격한다. 고라니와 고양이 그리고 알 수 없는 새들까지 그 죽음의 종류는 다양하고 참혹하다. 방금 죽은 동물의 몸에서 흐르는 아직 따듯한 피와 오래된 사체에 고인 시커먼 피까지, 나는 두 눈을 뜨고 바라보기만 했다. 동물과 인간의 공존을 이야기하지만 대체로 공염불일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길을 내어주는 게 아니라 그들과 함께 같은 길을 달리고 있음을 우린 종종 잊는다. 여전히 인간은 동물에게 자비를 베푸는 주체라고 착각한다는 점에서 이 비극은 끝을 알 수 없다.
적정속도를 정하고 구름다리를 만들어도 그들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 길 위의 생명은 동물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도 포함되어 있음을 잊는다면, 우리의 속도에 치어 언젠가 구원의 손길이 우리만 비껴갈지 모른다.
짧은 목줄에 묶인 개와 들개가 되어버린 유기견과 농약을 먹고 죽어있는 고양이. 한적한 도심 외곽 풍광 좋은 동네에서 나는 오늘도 생명과 자유가 속도와 자본이란 단어와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에 비통함을 느낀다. 다른 생명체가 지닌 권리를 우리 인간은 동물권이라고 부른다. 파주에서 인권과 평화를 느끼면서도 평소에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 갇혀 다른 생명의 고통에 무심하다는 한계를 체감한다.
2021년 9월 편지 한 통과 사진 한 장을 받았다.
편지에는 경상도 아이 보리문둥이가 광주의 조천호 군에게, 라고 적혀있었다.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유명한 사진과 광주민주화운동의 유족인 광주 조천호 군에게 아동문학의 거장인 권정생 작가가 보내는 위로의 편지였다. 당시 전하지 못한 편지를 출판사에서 아이들이 볼 수 있는 그림책으로 만들고 싶다는 의견을 보내왔다.
권정생 작가의 편지를 받은 나는 한참 망설였다.
광주민주화운동이란 아픈 역사를 그리는 어떤 소명의식이나 의미부여보다 앞서는 무엇이 있었다. 바로 5살 소년이 수의를 입고 아빠의 영정 사진을 가슴에 품어야 했던 마음을 나는 그려낼 자신이 없었다. 나 말고 더 유능한 작가가 더 멋진 책으로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수취인에게 전해지지 못한 편지가 내 마음에 오래 자리 잡았고, 나는 이 일에서 도망칠 수 없음을 알았다.
편집자와 함께 이제는 성인이 된 광주 조천호 씨를 만났다.
당시 미디어 노출을 꺼리던 조천호 씨는 자신의 두 아이에게 ‘사진 속 아이가 바로 아빠’라고 말할 수 있다면 출판에 동의한다고 하셨다.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책이란 무엇일까, 곱씹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생명체들을 생각한다. 돌봄노동이 필요한 노약자와 돌봄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적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이동권을 위해 투쟁하는 장애인의 인권이 장애인 당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잠재적 장애를 갖은 우리 모두의 일인 것처럼, 누군가의 보살핌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생명체는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들과 우릴 둘러싼 환경과 기후변화도 결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소외된 생명체들의 비극이 나의 일이라고 여겨질 때 나를 넘어 우리를 생각할 수 있다고 믿는다.
글 : 고정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예술하는 노동자로 산다. 그림책 『가드를 올리고』, 『봄꿈』, 『옥춘당』 그리고 산문집 『안녕하다』, 『그림책이라는 산』, 『시치미 떼듯 생을 사랑하는 당신에게』, 청소년 소설 『내 안의 소란』을 쓰고 그렸다.
노년을 맞이할 내가 바람이 있다면 앞으로 더 많은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것이다
파주에 있는 면 소재지의 작은 마을에 와 처음 한 일은 동네 작은도서관을 찾는 것이었다. 마을에 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핸드폰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서관을 검색했다. 대중교통 생활자에게 불편한 마을에 살지만, 나는 운전조차 불가능하다.
도보로 걸어갈 만한 거리에 위치한 작은도서관을 찾았다. 감색 벽돌이 예쁜 담장을 이루고 있는 작은도서관에서 두 달째 주민들과 글공부를 하고 있다. 내가 이곳에 와 한 일 중 가장 낭만적인 일이라고 자부한다. 모임을 이끄는 사람이 되고 ‘작가님’이라는 호칭이 붙지만, 내 능력이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칠 정도는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내가 잘하는 거라고는 뻔뻔하게 시작한 일에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것뿐이다.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 날, 도서관에 앉아 사람들과 장애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다. 창밖으로 소복하게 눈이 내리고, 마을회관 앞에 일렬로 주차된 바퀴 달린 유모차형 장바구니들이 보였다. 노인정이 있는 마을회관을 돌면 철새도래지 앞 국숫집에서 인심 좋은 주인장이 말아주는 양 많은 잔치국수에 낮술을 곁들이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의 모든 풍경이 낭만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차선 도로 중앙선에 서 있는 노인들을 볼 때면 마음이 서늘하다. 날씨에 비해 얇은 실내복 차림으로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방금 나선 자신의 집을 찾지 못하는 듯 보인다. 목줄을 달고 길을 헤매는 유기견을 볼 때도 마음에서 찬바람이 분다.
나는 이제 이곳에서 노년을 맞이할 것이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마을회관 옆 도서관에서 사람들과 글공부하는 시간이 앞으로도 오래 지속되어, 이곳의 사람들과 더 많은 관계를 만들어 가면 좋겠다. 내가 어느 날 현관 비밀번호와 사는 집 호수를 잊어버리고 맨발로 중앙선 위에 서 있는 날이 온다면 누군가가 나를 찾아주길 바란다. 그 순간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더없이 고마울 텐데.
그래서 나는 작은도서관이 소중하다.
길 위의 생명은 동물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도 포함되어 있다
속내를 감춘 듯 보이지만 그 자체가 실체인 안개처럼 뿌연 투명함을 지닌 도시 파주. 내겐 너무 과분한 절경을 보여주고 가끔 우울을 조심하라고 말해주는 풍경들. 과소비를 자책하는 내게, 이곳에 온 것을 그간 고생한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여기라는 친구의 말에 울컥했다. 운 좋게 대강 살아온 나에게 차고 넘치는 칭찬 같아서 부끄럽지만.
이사를 결심하기 전, 딱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바로 도로 위 죽은 동물들을 보는 괴로움이다. 이곳에서는 교통사고로 죽은 동물들을 간혹 목격한다. 고라니와 고양이 그리고 알 수 없는 새들까지 그 죽음의 종류는 다양하고 참혹하다.
방금 죽은 동물의 몸에서 흐르는 아직 따듯한 피와 오래된 사체에 고인 시커먼 피까지, 나는 두 눈을 뜨고 바라보기만 했다. 동물과 인간의 공존을 이야기하지만 대체로 공염불일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길을 내어주는 게 아니라 그들과 함께 같은 길을 달리고 있음을 우린 종종 잊는다. 여전히 인간은 동물에게 자비를 베푸는 주체라고 착각한다는 점에서 이 비극은 끝을 알 수 없다.
적정속도를 정하고 구름다리를 만들어도 그들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 길 위의 생명은 동물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도 포함되어 있음을 잊는다면, 우리의 속도에 치어 언젠가 구원의 손길이 우리만 비껴갈지 모른다.
짧은 목줄에 묶인 개와 들개가 되어버린 유기견과 농약을 먹고 죽어있는 고양이. 한적한 도심 외곽 풍광 좋은 동네에서 나는 오늘도 생명과 자유가 속도와 자본이란 단어와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에 비통함을 느낀다. 다른 생명체가 지닌 권리를 우리 인간은 동물권이라고 부른다. 파주에서 인권과 평화를 느끼면서도 평소에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 갇혀 다른 생명의 고통에 무심하다는 한계를 체감한다.
* 해당 원고의 의견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민주인권기념관의 공식 의견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파주시 주민이다. 우연히 들렀던 마을이 마음에 들어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경기도민이 되었다.
서울 집을 정리하고 파주에 오면서 내가 고른 집은 2000년도에 지어진 노인복지주택이었다. 이제는 규제가 풀린 오래된 공동주택은 저층이면서 휠체어가 지날 수 있는 넓은 복도와 승강기가 있다는 특징이 있다. 따로 공원이 필요 없을 정도로 곳곳에 산책로가 많고, 요즘은 정미소 옆 철새도래지에 온다는 흑두루미를 볼 날을 기다리고 있다.
병원 키오스크 앞에서 당황하는 노인의 모습이 떠오르다
많은 사람이 내 결정이 충동적이라고 했고 나도 문득 자신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복잡한 서울을 떠나 한가한 곳으로 거처를 옮기고 싶은 마음이 낯선 마을로 날 안내했다. 지금도 내 선택을 언제쯤 후회할지 궁금하다.
이삿짐을 정리하고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창공을 가로지르는 기러기 떼를 보았다. 볼록하고 귀여운 배를 보이며 떼를 지어 차례로 비행에 나선 그들을 보면서 서울살이를 고집했다면 볼 수 없는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40분에 한 대씩 지나가는 마을버스를 놓치지 않으려 동동대며 보내고, 고작 하루 도시가스가 연결되지 않았을 뿐인데 전에 없던 불편을 겪으면서 얼마나 게으른 문명인이 되었는지 실감했다. 주민센터는 모두 집 근처에 있는 줄 알았는데 읍내까지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제서야 내가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서 살다 왔음을 깨달았다.
전입 신고하러 읍내에 있는 주민센터를 찾았을 때 일이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에게 무상 마스크 중복 수령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자신의 마스크를 단단하게 고쳐 쓰는 주민센터 공무원의 모습을 보았다. 성매매 여성들의 일터를 철거해 더 좋은 생활환경을 만들자는 데 동의를 구하는 전단이 비치되어 있었다. 철거에 관한 입장이 한쪽으로 치우친 내용에 나는 동의하기 힘들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40분 동안 기다리며 나는 급할 게 없는 한량처럼 쏘다니다가 목이 늘어진 양말처럼 앉아 읍내 풍경을 관찰했다. 전입신고를 위해 하루 반나절을 쓰고 느낀 사실은, 누군가에겐 하루 반나절이 걸리는 일이 온라인으로는 3분이면 끝난다는 거였다. 병원 키오스크 앞에서 당황하는 노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노년을 맞이할 내가 바람이 있다면 앞으로 더 많은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것이다
파주에 있는 면 소재지의 작은 마을에 와 처음 한 일은 동네 작은도서관을 찾는 것이었다. 마을에 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핸드폰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서관을 검색했다. 대중교통 생활자에게 불편한 마을에 살지만, 나는 운전조차 불가능하다.
도보로 걸어갈 만한 거리에 위치한 작은도서관을 찾았다. 감색 벽돌이 예쁜 담장을 이루고 있는 작은도서관에서 두 달째 주민들과 글공부를 하고 있다. 내가 이곳에 와 한 일 중 가장 낭만적인 일이라고 자부한다. 모임을 이끄는 사람이 되고 ‘작가님’이라는 호칭이 붙지만, 내 능력이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칠 정도는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내가 잘하는 거라고는 뻔뻔하게 시작한 일에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것뿐이다.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 날, 도서관에 앉아 사람들과 장애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다. 창밖으로 소복하게 눈이 내리고, 마을회관 앞에 일렬로 주차된 바퀴 달린 유모차형 장바구니들이 보였다. 노인정이 있는 마을회관을 돌면 철새도래지 앞 국숫집에서 인심 좋은 주인장이 말아주는 양 많은 잔치국수에 낮술을 곁들이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의 모든 풍경이 낭만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차선 도로 중앙선에 서 있는 노인들을 볼 때면 마음이 서늘하다. 날씨에 비해 얇은 실내복 차림으로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방금 나선 자신의 집을 찾지 못하는 듯 보인다. 목줄을 달고 길을 헤매는 유기견을 볼 때도 마음에서 찬바람이 분다.
나는 이제 이곳에서 노년을 맞이할 것이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마을회관 옆 도서관에서 사람들과 글공부하는 시간이 앞으로도 오래 지속되어, 이곳의 사람들과 더 많은 관계를 만들어 가면 좋겠다. 내가 어느 날 현관 비밀번호와 사는 집 호수를 잊어버리고 맨발로 중앙선 위에 서 있는 날이 온다면 누군가가 나를 찾아주길 바란다. 그 순간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더없이 고마울 텐데.
그래서 나는 작은도서관이 소중하다.
길 위의 생명은 동물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도 포함되어 있다
속내를 감춘 듯 보이지만 그 자체가 실체인 안개처럼 뿌연 투명함을 지닌 도시 파주. 내겐 너무 과분한 절경을 보여주고 가끔 우울을 조심하라고 말해주는 풍경들. 과소비를 자책하는 내게, 이곳에 온 것을 그간 고생한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여기라는 친구의 말에 울컥했다. 운 좋게 대강 살아온 나에게 차고 넘치는 칭찬 같아서 부끄럽지만.
이사를 결심하기 전, 딱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바로 도로 위 죽은 동물들을 보는 괴로움이다. 이곳에서는 교통사고로 죽은 동물들을 간혹 목격한다. 고라니와 고양이 그리고 알 수 없는 새들까지 그 죽음의 종류는 다양하고 참혹하다. 방금 죽은 동물의 몸에서 흐르는 아직 따듯한 피와 오래된 사체에 고인 시커먼 피까지, 나는 두 눈을 뜨고 바라보기만 했다. 동물과 인간의 공존을 이야기하지만 대체로 공염불일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길을 내어주는 게 아니라 그들과 함께 같은 길을 달리고 있음을 우린 종종 잊는다. 여전히 인간은 동물에게 자비를 베푸는 주체라고 착각한다는 점에서 이 비극은 끝을 알 수 없다.
적정속도를 정하고 구름다리를 만들어도 그들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 길 위의 생명은 동물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도 포함되어 있음을 잊는다면, 우리의 속도에 치어 언젠가 구원의 손길이 우리만 비껴갈지 모른다.
짧은 목줄에 묶인 개와 들개가 되어버린 유기견과 농약을 먹고 죽어있는 고양이. 한적한 도심 외곽 풍광 좋은 동네에서 나는 오늘도 생명과 자유가 속도와 자본이란 단어와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에 비통함을 느낀다. 다른 생명체가 지닌 권리를 우리 인간은 동물권이라고 부른다. 파주에서 인권과 평화를 느끼면서도 평소에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 갇혀 다른 생명의 고통에 무심하다는 한계를 체감한다.
2021년 9월 편지 한 통과 사진 한 장을 받았다.
편지에는 경상도 아이 보리문둥이가 광주의 조천호 군에게, 라고 적혀있었다.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유명한 사진과 광주민주화운동의 유족인 광주 조천호 군에게 아동문학의 거장인 권정생 작가가 보내는 위로의 편지였다. 당시 전하지 못한 편지를 출판사에서 아이들이 볼 수 있는 그림책으로 만들고 싶다는 의견을 보내왔다.
권정생 작가의 편지를 받은 나는 한참 망설였다.
광주민주화운동이란 아픈 역사를 그리는 어떤 소명의식이나 의미부여보다 앞서는 무엇이 있었다. 바로 5살 소년이 수의를 입고 아빠의 영정 사진을 가슴에 품어야 했던 마음을 나는 그려낼 자신이 없었다. 나 말고 더 유능한 작가가 더 멋진 책으로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수취인에게 전해지지 못한 편지가 내 마음에 오래 자리 잡았고, 나는 이 일에서 도망칠 수 없음을 알았다.
편집자와 함께 이제는 성인이 된 광주 조천호 씨를 만났다.
당시 미디어 노출을 꺼리던 조천호 씨는 자신의 두 아이에게 ‘사진 속 아이가 바로 아빠’라고 말할 수 있다면 출판에 동의한다고 하셨다.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책이란 무엇일까, 곱씹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생명체들을 생각한다. 돌봄노동이 필요한 노약자와 돌봄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적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이동권을 위해 투쟁하는 장애인의 인권이 장애인 당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잠재적 장애를 갖은 우리 모두의 일인 것처럼, 누군가의 보살핌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생명체는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들과 우릴 둘러싼 환경과 기후변화도 결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소외된 생명체들의 비극이 나의 일이라고 여겨질 때 나를 넘어 우리를 생각할 수 있다고 믿는다.
글 : 고정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예술하는 노동자로 산다. 그림책 『가드를 올리고』, 『봄꿈』, 『옥춘당』 그리고 산문집 『안녕하다』, 『그림책이라는 산』, 『시치미 떼듯 생을 사랑하는 당신에게』, 청소년 소설 『내 안의 소란』을 쓰고 그렸다.
노년을 맞이할 내가 바람이 있다면 앞으로 더 많은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것이다
파주에 있는 면 소재지의 작은 마을에 와 처음 한 일은 동네 작은도서관을 찾는 것이었다. 마을에 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핸드폰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서관을 검색했다. 대중교통 생활자에게 불편한 마을에 살지만, 나는 운전조차 불가능하다.
도보로 걸어갈 만한 거리에 위치한 작은도서관을 찾았다. 감색 벽돌이 예쁜 담장을 이루고 있는 작은도서관에서 두 달째 주민들과 글공부를 하고 있다. 내가 이곳에 와 한 일 중 가장 낭만적인 일이라고 자부한다. 모임을 이끄는 사람이 되고 ‘작가님’이라는 호칭이 붙지만, 내 능력이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칠 정도는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내가 잘하는 거라고는 뻔뻔하게 시작한 일에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것뿐이다.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 날, 도서관에 앉아 사람들과 장애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다. 창밖으로 소복하게 눈이 내리고, 마을회관 앞에 일렬로 주차된 바퀴 달린 유모차형 장바구니들이 보였다. 노인정이 있는 마을회관을 돌면 철새도래지 앞 국숫집에서 인심 좋은 주인장이 말아주는 양 많은 잔치국수에 낮술을 곁들이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의 모든 풍경이 낭만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차선 도로 중앙선에 서 있는 노인들을 볼 때면 마음이 서늘하다. 날씨에 비해 얇은 실내복 차림으로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방금 나선 자신의 집을 찾지 못하는 듯 보인다. 목줄을 달고 길을 헤매는 유기견을 볼 때도 마음에서 찬바람이 분다.
나는 이제 이곳에서 노년을 맞이할 것이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마을회관 옆 도서관에서 사람들과 글공부하는 시간이 앞으로도 오래 지속되어, 이곳의 사람들과 더 많은 관계를 만들어 가면 좋겠다. 내가 어느 날 현관 비밀번호와 사는 집 호수를 잊어버리고 맨발로 중앙선 위에 서 있는 날이 온다면 누군가가 나를 찾아주길 바란다. 그 순간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더없이 고마울 텐데.
그래서 나는 작은도서관이 소중하다.
길 위의 생명은 동물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도 포함되어 있다
속내를 감춘 듯 보이지만 그 자체가 실체인 안개처럼 뿌연 투명함을 지닌 도시 파주. 내겐 너무 과분한 절경을 보여주고 가끔 우울을 조심하라고 말해주는 풍경들. 과소비를 자책하는 내게, 이곳에 온 것을 그간 고생한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여기라는 친구의 말에 울컥했다. 운 좋게 대강 살아온 나에게 차고 넘치는 칭찬 같아서 부끄럽지만.
이사를 결심하기 전, 딱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바로 도로 위 죽은 동물들을 보는 괴로움이다. 이곳에서는 교통사고로 죽은 동물들을 간혹 목격한다. 고라니와 고양이 그리고 알 수 없는 새들까지 그 죽음의 종류는 다양하고 참혹하다.
방금 죽은 동물의 몸에서 흐르는 아직 따듯한 피와 오래된 사체에 고인 시커먼 피까지, 나는 두 눈을 뜨고 바라보기만 했다. 동물과 인간의 공존을 이야기하지만 대체로 공염불일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길을 내어주는 게 아니라 그들과 함께 같은 길을 달리고 있음을 우린 종종 잊는다. 여전히 인간은 동물에게 자비를 베푸는 주체라고 착각한다는 점에서 이 비극은 끝을 알 수 없다.
적정속도를 정하고 구름다리를 만들어도 그들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 길 위의 생명은 동물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도 포함되어 있음을 잊는다면, 우리의 속도에 치어 언젠가 구원의 손길이 우리만 비껴갈지 모른다.
짧은 목줄에 묶인 개와 들개가 되어버린 유기견과 농약을 먹고 죽어있는 고양이. 한적한 도심 외곽 풍광 좋은 동네에서 나는 오늘도 생명과 자유가 속도와 자본이란 단어와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에 비통함을 느낀다. 다른 생명체가 지닌 권리를 우리 인간은 동물권이라고 부른다. 파주에서 인권과 평화를 느끼면서도 평소에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 갇혀 다른 생명의 고통에 무심하다는 한계를 체감한다.
* 해당 원고의 의견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민주인권기념관의 공식 의견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