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소식

민주주의 에세이찬물의 위아래보다 중요한 것 | 이성경

“성경 씨~ 오늘 하루 어땠어요?”
“성경 씨~ 고마워요!”


우리 집 두 어린이는 수시로 내 이름을 부른다. 나도 어린이들을 “아리 씨”, “한들 씨”로 부르며 존칭을 사용한다. 첫째는 체리, 둘째는 망고, 남편은 강냉이, 나는 자두로 서로를 부르며 평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나이, 성별, 장애, 외모, 재산 등 다양한 차이에 상관없이 동등한 주체로 존중받기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우리 집 안에서 벌어지는 불평등과 차별을 개선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 딸, 엄마, 아빠, 첫째, 둘째처럼 ‘성별’, ‘역할’, ‘위계’를 구분하는 말이 아닌 서로를 동등하게 부르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민주적인 의사소통 분위기 조성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제안했다. 어린이들에게 “야! 너!” 수직적인 호칭을 쓰며 함부로 대하지 않기 위한 장치다. 가족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어 이제는 익숙하다.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하는 가족 관계

엄마로 불릴 때는 사회의 기대치에 맞춰 뭔가를 수행해야 할 것 같은데 “성경 씨”나 “자두”로 불릴 때 ‘엄마다움’을 벗어던지고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할 수 있어서 내 마음가짐도 한결 더 가볍다.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이 차가 나는 배우자여서 결혼 초에는 “오빠”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부르면서도 불편한 호칭이었는데 “승구 씨”나 “강냉이”라고 부르면서 부부관계가 조금 더 동등해진 기분이다. 할머니가 되어도 “성경 씨”나 “자두”로 불리고 싶다. 


가정은 흔히 사적 영역으로 여겨지지만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시민들의 작은 공동체이기도 하다. 집 밖의 공동체 생활을 위한 삶의 훈련장이자 곧 작은 사회인 것이다. 가정에서 서로를 존재 자체로 바라보며 민주적으로 관계 맺기가 일상이 된다면 집 밖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지 않을까?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거야. 어른들 먼저 드리는 게 예의란다.”


가족 외식에서 남편이 아이들에게 말했다. 10살 첫째 곁에 물과 컵이 있어서 아이가 가족들에게 나눠주는데 가장 먼저 8살 동생에게 물을 따라주니 남편은 예의범절을 가르쳐야 할 때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람 간의 관계에서 위아래를 따지는 것이 싫다.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말은 어른들이 만든 말이고, 어른들이 지키고 있는 가치일 뿐, 어린이 입장에서 꼭 수긍할 필요는 없는 질서다.


“엄마는 아빠의 말이 어린이 차별이라고 생각하는데, 너희 생각은 어때?”
“기분 나쁜 말이야! 물은 목마른 사람이 먼저 먹으면 되지! 위아래는 왜 정해놨어?”


그렇다. 역시 어린이는 훌륭하다. 우리가 키워야 하는 능력은 위아래를 감지하고 위를 높이는 처신술이 아니라 목마른 사람이 누구인지 살피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다.

비슷한 경우가 자주 있다. 어른들 대화에 참여하려고 하는 어린이들에게 “어른들 말씀하는 데 끼어들지 말라.”거나 “어린이는 몰라도 된다.”는 말로 침묵을 강요한다. 어른들은 어린이의 대화에 마음대로 끼어들고, 대화를 중단시키거나 가르치려 들면서 말이다.

일방적인 소통은 이제 그만

학교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동의'와 '경계' 교육을 하면서 경계를 침범당하여 불편한 경험을 나눠달라고 하면 꼭 빠지지 않고 나오는 사례가 있다. 뽀뽀하기 싫은데 어른들은 묻지도 않고 뽀뽀한다는 것이다. 사진찍기 싫다고 했는데도 억지로 찍게 했다는 경험도 자주 나온다. 그럴 때 기분이 어땠냐고 물으면 “제 말을 무시해서 기분 나빴어요.” , “제가 인형이 된 기분이었어요.” 한다.  

더 씁쓸한 것은 싫다고 자기 의사를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부모가 실망할까 봐, 기분 나빠할까 봐, 슬퍼할까 봐 싫어도 그냥 참는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을 어떤 보이지 않는 힘으로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답답함과 억울함이 쌓인다.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가 결혼 후 남편에게, 시어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할 수 없었던 여러 상황이 떠올라 가슴이 아프다. 하고 싶은 말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한쪽이 침묵하는 관계는 건강한 관계가 아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힘 있는 자들의 말이 넘친다. 약자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귀가 부족하다. 권력이 작동하는 관계 안에서 선택지가 단 하나뿐인 선택이 반복되면 자존감이 타격을 입는다. 존재가 존재 자체로 빛나기 위해서는 말 못 하는 관계, 일방적인 소통을 끊어내야 하는데, 약자들에게 어려운 일이다. 힘이 있는 쪽에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자주 의견을 물어야 하는 이유다.


“뽀뽀해도 될까? 싫으면 싫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 너의 의견을 존중할게.” 
“아빠는 담배 냄새가 나서 뽀뽀하기 싫어요. 수염이 까슬해서 아파요.” 

질문하면 그제야 알게 되는 진실이 있다. 어린이들이 자기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다면, 힘 있는 자들이 약자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한다면, 그 경험은 어린이의 한 시절에 머물지 않는다. 잘 묻고 잘 들어주는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어른들의 통제와 지배 속에서 침묵하는 어린이를 착한 아이라고 칭찬하지 말자. 침묵과 순응보다 부당함에 대한 저항이 칭찬이 될 수 있도록 어린이가 용기 내어 자기 생각과 감정을 말할 때 “고맙다.” 말하자.


평등한 즐거움을 위한 약속

회사가 정기적으로 회의하듯 가족회의를 연다. 각자 가족 구성원들에게 지켜줬으면 하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간이다. 나는 밥 걱정하지 않고 집 밖에서 일할 권리를 주장하며 남편의 적극적인 돌봄과 가사 참여를 요구한다. 남편은 취미 생활을 즐길 권리를 주장하고, 아이들도 각자의 목소리를 낸다. 서로의 권리가 충돌할 때는 대화와 협상으로 절충안을 찾는다. ‘나’의 권리를 찾고, 스스로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공동체 내에서 존중받는 경험을 쌓아가는 과정이다. 평등한 관계를 위한 약속, 평등한 노동을 위한 약속, 평등한 즐거움을 위한 약속도 주기적으로 점검한다.

“아빠, 생김치 먹고 싶은데 해줄 수 있어?”


우리 집 두 어린이는 먹고 싶은 음식이 있을 때, 아빠에게 말한다. 어린이들도 외식이나 배달 음식보다 좋은 재료로 사랑과 정성 듬뿍 담아 만든 집밥을 더 좋아한다.

“응, 무슨 김치를 해줄까?”


두 아이의 식성이 무척 달라 대답도 다르다. 첫째는 배추김치와 파김치를, 둘째는 깍두기를 해달란다. 남편은 휴일 아침 일찍 혼자서 마트에 간다. 식재료를 사 와서 숙련된 솜씨로 3가지 김치를 뚝딱 만든다. 남편이 시래기를 삶는다. 한동안 맛있는 시래기 된장국을 먹을 수 있다! 남편이 직접 삶은 시래기가 들어간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집 안 가득 퍼지면 하나둘 식탁으로 모인다.


남편은 집안일을 ‘돕는 사람’이었는데 어느새 집안일을 주체적으로 ‘하는 사람’이 되었다. 남편이 할 수 있는 요리 가지 수가 늘어갈수록 부부싸움은 줄고 부부관계는 좋아졌다. 여자니까 엄마니까 당연하다는 말에 순응하지 않고 계속 싸워서 얻은 성취다.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내는 것은 갈등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약자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 민주적인 성장이다. 위아래 구분 없이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 희미해진 존재들이 선명해지는 길이다.


글 : 이성경

‘부너미’ 대표. 언제까지 세상이 바뀌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변화의 주체가 된 엄마들이 모여 함께 읽고, 쓰고, 듣고, 말한다.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 『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 『우리 같이 볼래요?』를 함께 썼다. 아동청소년양육자 대상으로 성평등교육활동을 한다. 
* 해당 원고의 의견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민주화운동기념관의 공식 의견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