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소식

민주주의 에세이폭력에서 안전할 권리: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 | 최하란

남영동 대공분실은 국가권력이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가 고문하고, 사건을 조작하고, 살인과 은폐를 저지르던 곳이다. 가식을 벗어던진 권력이 흉포한 맨얼굴을 드러내던 곳은 1976년 ‘국제해양연구소’라는 가짜 간판을 달고 시작됐다. 당시 흔하디흔한 부실 시공업체가 대충 만들기는커녕 희대의 건축가 김수근의 재능을 빌려 완성됐다. 덕분에 건물 전체에 독재정권의 사악한 목적의식, 공포와 굴종에 대한 강박이 치밀하게 구현됐다. 이제 이 조직적이고 계획적이었던 국가범죄의 현장이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재탄생한다. 이십 대 초반 그곳에 끌려갔던 나로서는 감회가 남다르다. 며칠간 모든 진술을 거부했지만,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다. 전적으로 나보다 먼저 끌려갔던 많은 선배들, 그들의 헌신, 그 헌신과 죽음을 기억하며 항거했던 수많은 사람들, 그 모든 피와 땀과 눈물 덕분이었다.


민주주의는 정지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이나 미래에도 나아지거나 나빠질 수 있다. 민주주의는 국회의사당이나 대통령실의 실내 장식 같은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의 말뜻은 다수의 지배가 아닌가. 따라서 다수의 삶과 동떨어진 민주주의는 가짜다. 평범한 다수의 삶이 불안해지고 위태로워진다면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는 것이다. 석방된 뒤에서야 비로소 나는 건강이 급속히 나빠졌음을 알아차렸다. 나는 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건강이 회복될수록 이 운동 저 운동에 재미가 붙어 열심히 배웠다. 그러다 보니 스물일곱 살부터 운동을 가르치는 삶을 살게 됐다. 이 글은 셀프 디펜스를 교육하는 강사로서 쓰고 있다. 셀프 디펜스는 폭력 상황에서 정당하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모든 것(관점, 관찰, 판단, 언어, 몸짓, 행동 등)을 말한다.


여전히 현실은 지독하게 불평등해서 어느 순간 깜짝 놀랄 만큼 우리 삶을 폭력적으로 뒤흔들고 파괴한다. 자기 자신이 폭력을 꺼리고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폭력을 모르고 살 수 없는 환경이다. 그러나 폭력에서 안전해지는 것은 자판기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 폭력은 진공상태가 아니라 사회관계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폭력은 불평등을 먹고 자란다

유엔(UN), 세계은행(WB), 세계보건기구(WHO), 미국연방수사국(FBI)은 불평등이 심할수록 폭력이 많이 발생한다고 보고한다. 폭력과 폭력의 정도는 불평등과 등락을 같이 한다.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아동 사이의 집단 괴롭힘도 흔하게 일어난다.  불평등이 심할수록 차별도 심하다. 불평등이 심할수록 불공정과 부정부패도 많다. 불평등이 심할수록 사회관계가 적대적이고 폭력적이기 쉽다. 반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조건과 긍정적인 소통을 익힐 기회는 극히 제한된다.


그런데 미디어는 폭력적이고 끔찍한 사건들을 좋아할 뿐 아니라 매우 집중해 반복적으로 다룬다. 동시에 권력층도 제 잇속을 챙기려고 한다. 정부는 범죄에 대한 처벌 강화와 강력 대응을 천명하면서 범죄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과 분노를 권력과 억압의 강화에 이용한다. 가난과 실업, 저임금, 고물가, 과로사, 전세 사기, 산업재해, 환경오염, 기후 위기 해결에는 너무나 무심하면서 말이다.


범죄에 대한 처벌강화주의는 문제의 원인을 줄이기는커녕 가리는 효과가 있다. 문제의 사회적・경제적 원인이 아니라 개인에게 주목하는 효과를 내는 것이다. 정부 입장에서는 그게 더 쉽고 편할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폭력과 범죄를 양산하는 불평등과 빈곤의 심화를 막기 위해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폭력도 두려움도 유독 사회적 약자를 위협한다

폭력범죄에 관해 한국은 비교적 안전한 국가에 속한다. 살인범죄율이 2021년 인구 10만 명당 6.8건인 미국에 비해 한국은 10만 명당 0.5건으로 낮은 편이다. 그러나 낮은 살인범죄율에도 불구하고 유독 범죄 안전 인식에서 남녀의 격차가 크다. 현재 우리 사회가 여성폭력 범죄에서 안전하다고 느끼는 여성은 16.3%에 불과하다. 여성폭력 피해 경험률은 34.9%로 여성 세 명 중 한 명꼴로 폭력 피해를 경험했다.


여성은 직장에서도 성적 괴롭힘을 경험한다. 2021년 발표된 한 보고서는 성희롱 피해 제보자의 83.2%가 여성이고, 가해 행위자의 89%가 피해자보다 서열상 우위에 있으며, 성희롱 신고 후 90.4%가 불이익을 겪었다고 보고했다. 여성이 비정규직 비율이 더 높고 저임금 노동자인 경우도 더 많다. 여성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은 남성의 64.6%밖에 되지 않는다. 가사, 양육, 돌봄은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일이지만, 그 책임은 주로 여성에게 전가된다. 여성은 또한 성적 대상으로 취급된다. 여성의 몸은 거의 모든 매체에서 물건처럼 전시된다. 여성을 이등시민으로 취급하는 이 모든 것들이 여성에 대한 폭력의 자양분이 된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

이러한 현실에서 셀프 디펜스는 알아두면 좋은 기술이다. 그러나 거의 개인적 대책에 해당한다. 훨씬 더 많은 여성들, 그리고 다른 사회적 약자들도 안전해지는 길은 오직 사회변화와 사회변화를 위한 대중행동에 있다. 폭력은 불평등을 먹고 자라, 사회가 불평등할수록 폭력이 더 많다. 따라서 폭력에서 안전해질 권리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더 나은 삶과 미래가 보장되어야 한다. 평범한 다수의 삶을 위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과 떼려야 뗄 수 없다.


글 : 최하란

‘움직임의 학교’ 스쿨오브무브먼트의 공동대표이며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폭력예방 통합교육 전문 강사다. 중앙경찰학교 자문위원 및 충북여성재단 초빙연구위원을 역임했고, 서울시 디지털성범죄 근절 및 예방정책 제안 우수상을 받았다. 국제단체 KMG의 시민, 여성, 아동과 청소년 셀프 디펜스 지도자 자격을 가지고 있다. 책 『케틀벨 퀵 리절트』, 『여성을 위한 셀프 디펜스 핸드북 1,2』, 『불평등, 여성, 셀프 디펜스』를 썼고, 『맨몸의 전사』, 『움직임』, 『크라브 마가: 무장한 공격자에 맞서 스스로 방어하는 방법』, 『인요가: 철학과 수련』을 번역했다.

* 해당 원고의 의견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민주화운동기념관의 공식 의견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