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소식

민주주의 에세이‘인종차별 폭력‘ 소도시가 시민 네트워크로 변모하다 | 이광빈

2023년 5월 독일 동부 폴란드 접경 지역의 소도시 바이스바써에 가는 길이었다. 한국과 독일의 차관급 협의체인 한독통일자문위원회 회의 참석차 독일을 찾았던 때였다. 회의 전날 현장 답사 프로그램으로 독일 총리실에서 한국 측 위원단을 바이스바써로 안내했다.

바이스바써에 가까워지고 있었을 때 뒷좌석에 앉았던 한 교수님이 도로에 있는 한 표지판을 가리켰다. 호이어스베르다라고 적힌 표지판이었다. 2년여 전 베를린 특파원으로 있었을 때 들었던 사건이 떠올랐다. 호이어스베르다는 독일 통일 다음 해인 1991년 대규모 인종차별 테러가 일어난 소도시였다.

신나치주의자 수백 명이 쇠 파이프와 화염병을 들고 망명 심사를 받던 외국인들의 거주지를 습격했다. 수십 명의 외국인들이 다쳤다. 주로 아프리카, 베트남 출신들이었다. 공격은 1주일간 계속됐다. 호이어스베르다의 일부 시민은 외국인 거주지를 공격하는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 독일 사회에 충격을 안겨줬다.

당시 독일은 외국인을 상대로 한 잇따른 인종차별 폭력 사태로 병들어간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정치인·지식인들이 호소했지만, 극우세력의 '외국인 사냥' 광기는 상당 기간 번뜩였다. 망명 신청자 집단 거주지와 외국인 거주 주택에 대한 방화, 투석이 이어졌다. 거리에선 외국인들에 대한 폭력이 자행되기도 했다. 테러로 끔찍하게 살해된 이들도 있었다. 외국인들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간접적인 압박 현상도 나타났다.

실업률 증가 등 경제적 상황과 민족주의의 부상이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맞물려 외국인들, 특히 독일에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온 외국인 노동자들과 아프리카에서 정치·경제적 이유로 온 난민들의 인권을 짓밟은 것이다. 폭력의 배경에는 단순한 외국인 배척 경향뿐 아니라 인종차별 정서가 강하게 작용했다.


신나치주의자들의 아지트가 된 도시
바이스바써는 호이어스베르다와 차로 30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당시 바이스바써도 분위기가 크게 다르지 않았을 터였다 바이스바써에는 최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신나치주의자들의 아지트가 있었다. 과거 동독 시절 지어진 모텔이 신나치주의자들의 집단 거주지화 됐었다. 극우주의자들이 기승을 부릴 때는 이 도시는 쇠락해가는 시점이었다. 동서독 분단기에 갈탄(석탄의 일종) 채굴과 유리공예로 번성했으나, 통일 후 지역 경제가 급속히 위축되기 시작했다. 유리 공예 공장은 한 곳을 제외하고 문을 닫았다. 서독의 유리 공예품에 밀렸다. 갈탄 매장량이 줄어들어 탄광산업이 사양화되는 데다, 연방정부의 탈석탄 정책에 직격탄을 맞았다.

거리엔 실업자가 넘쳤고, 일자리를 찾으러 대도시로 떠나는 젊은이들이 줄을 이었다. 독일 통일 후 실업 등 경제 악화에 시달린 많은 동독 지방 소도시들 가운데서 바이스바써는 대표적인 지역에 속했다. 동독의 빈곤한 지역 10분위 중 9분위에 속할 정도였다. 동독 지역 경제 상황이 점차 좋아지면서 서독 지역과의 격차가 상당히 줄어든 시점에도 바이스바써는 좀처럼 반등하지 못했다. 1990년 통일 당시만 해도 인구는 3만 8천 명이었는데, 2016년에는 1만 5천 명 수준으로 감소했다. 신나치주의자들은 이런 배경 속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난 셈이다.

네트워크 강화를 통해 도시를 재생하다
그러나 바이스바써는 2010년대 중반 정도부터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탈석탄화 과정에서 연방정부로부터 받은 지원금 등을 토대로 도시를 재생해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다. 갈탄이 채굴되고 난 넓은 황무지는 호수와 숲으로 변했다. 을씨년스러웠던 빈 유리공장은 벤처기업들이 들어왔고, 관광지화됐다. 신나치주의자들의 아지트는 시 당국이 매입해 강제 철거해버렸다. 신나치주의자들은 결국 이 도시를 떠났다.

바이스바써에선 신나치주의자 집단이 떠났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 간의 네트워크도 강화됐다. 새로 도시로 온 주민들은 기존 주민들과 원활하게 어울리면서 지역사회에 녹아들 수 있었다. 지역사회에서 협력이 강화됐고, 시민사회는 건강해졌다. 현재 동독지역에서 극우 성향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기세를 올리고 있지만, 바이스바써는 비켜 가는 듯했다. 바이스바써를 떠나는 이들보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이들이 많아졌다. 바이스바써는 유럽이 아닌 다른 지역 외국인들의 유입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문제를 극복하고 발전한 도시로 변모하다
특파원 시절이던 2019년 11월 슈타지 문서기록소장으로 연방정부 특임관(장·차관급) 롤란트 얀과 인터뷰를 한 바 있다. 얀은 동독 언론인 출신으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서독으로 강제 추방됐던 인물이다. 얀에게 동독 지역에서 극우 정당 지지율이 높게 나오는 이유를 물었다. 얀은 동독에서 민주주의의 역사가 짧기 때문이라고 했다. 독재사회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바뀐 지 3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아 아직 자유민주주의적 시민사회 역량이 옛 서독 지역에 비해 덜 축적됐다고 설명했다.

독일 총리실은 왜 한독통일자문위원회 한국 측 위원들을 왜 바이스바써로 안내했을까. 옛 동독 지역에서 극우세력이 옛 서독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거세 외국인에 대한 증오와 혐오가 강하다는 인식이 크다. 그런데 바이스바써는 네트워크 강화와 공동 협력과 참여 등을 통해 기존 문제점들을 극복하고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소외된 옛 동독 지역에서도 주민들의 민주주의적 의식과 인권에 대한 인식 향상과 경제적 발전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다는 점을 독일 총리실은 보여주고 싶어 한 게 아니었을까.


글 : 이광빈
연합뉴스·연합뉴스TV 기자. 베를린 특파원을 거쳐 국제뉴스부 기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연합뉴스 <뉴스프리즘>의 진행자이다. 저서로는 『힙 베를린, 갈등의 역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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