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소식

민주주의 에세이형평운동으로 살펴보는 우리의 민주주의 | 김주완


경남 진주시 가좌동 석류공원 아래에 형평운동가 강상호 선생의 묘가 있다. 그러나 1999년 이전까지 이곳은 잡초가 무성했고 아무런 표석도 없어 누구의 묘인지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이후 누가 세웠는지 알 수 없는 ‘백촌 강상호 지묘’라는 묘비석이 생겼는데, 뒷면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모진 풍진의 세월이 계속될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선생님이십니다. 작은 시민이.’


이 ‘작은 시민’은 과연 누구일까? 추적 끝에 건립비용을 댄 사람이 김장하 선생임을 알게 됐다. 그는 1992년 형평운동기념사업회를 만든 분이기도 하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기념(記念)’이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잊지 않고(記) 마음에 되새김(念)’이라는 사전적 의미와 달리 대개의 기념사업이 기(記)에만 치우쳐 과거의 일을 박제화하는 데에 급급한 경우를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평운동기념사업회 결성 당시 첫 이사회에서 김장하 회장의 인사말은 이랬다.


“반차별 정신을 계승하고 평등 사상의 존귀함은 오늘날 사회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빈부차별, 성차별, 장애인차별, 노인차별 등 사회 곳곳에 차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70년 전의 반차별 운동을 기념하며, 그 정신을 계승하여 정의사회를 구현하여야 합니다. 오늘의 모임이 이러한 일을 시작하는 작은 옹달샘으로서 앞으로 큰 강물을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에 기초하여 작성된 창립취지문도 과거를 기억하는데 머물지 않고 오늘의 현실에 그 정신을 되살려 계승하겠다는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형평사를 만들고 키웠던 정신은 과거만의 것이 아닙니다. 민주화로 나아가는 오늘의 정신이고, 서로를 사랑하고 똑같이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인류의 영원한 정신입니다. 그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의 삶을 일구는 일이며, 이 땅을 더 나은 삶의 터전으로 가꾸는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100년 전 만들어진 평등세상 실현을 위한 단체, 형평사 

알다시피 형평사(衡平社)는 1923년 진주에서 시작된 백정들의 반(反) 차별 신분철폐 운동이자 평등세상 실현을 위한 인권운동단체였다. 100년 전 이를 주도한 강상호 선생은 양반이자 부호의 아들로 얼마든지 호의호식할 수 있었음에도 전 재산을 털어 세상의 가장 천대받는 이들 편에서 평생을 바친 사회운동가였다. 


그보다 앞서 1907년 경남지역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섰고, 1917년 가뭄과 홍수로 이재민이 속출하자 곳간을 열어 구휼에 나섰다. 1925년까지 매년 극빈자들의 호세(주민세와 비슷한 지방세)를 대납하기도 했다. 1919년에는 진주의 3·1독립운동을을 주도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장하 선생의 삶도 다르지 않았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진학을 못 했다. 삼천포의 한약방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주경야독으로 한약업사 자격을 얻었다. 스무 살에 한약방을 열고 20대 중반부터 자신처럼 가정형편으로 진학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기 시작, 2021년까지 1,000명이 넘는 학생을 키웠다. 나이 마흔에는 100억 원의 재산을 털어 명신고등학교를 설립, 7년 후 국가에 헌납했다.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는 가장 좋은 일이 곧 장학사업이 되었던 것이고, 또 학교의 설립이었습니다. (…) 그런 이유에서 설립된 것이 이 학교이면, 본질적으로 이 학교는 제 개인의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명신고등학교 이사장 퇴임사)


학교 헌납 이후에도 그의 장학사업은 계속되었고, 진주지역의 문화예술단체는 물론 언론·환경·시민·노동·농민·여성운동에까지 지원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특히 나는 취재하는 과정에서 그가 여성단체 설립과 호주제 폐지 운동에 힘을 보탰고, 여성평등기금 조성과 가정폭력 피해여성 보호시설 건립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또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여성도 사람이다.’라는 그의 철학에 바탕으로 한 일이었다.


세상을 바꿔나가는 건 거인이 아니라 평범한 작은 시민들 

김장하 선생은 자신의 선행을 드러내는 걸 극도로 꺼렸고, 어떤 언론과의 인터뷰도 거절했다. 장학금 수여식 또는 전달식도 하지 않았다. 장학증서도 만들지 않았고 사진도 찍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장학생 숫자와 명단, 지원금액을 밝히지 않는다. 1,000명이라는 숫자도 내가 취재한 결과 추산한 것이다.

2021년 말 그가 설립해 20여 년간 이사장으로 있던 남성문화재단을 해산하면서 잔여재산 34억 5,000만 원 전액을 경상국립대에 기부했다. 은퇴를 결심한 것이다. 2022년 5월에는 한약방도 문을 닫았다. 그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달려온 한 장학생이 선생에게 말했다.
“제가 선생님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 되어 죄송합니다.”

그러자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그런 걸 바란 게 아니야.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세상에는 늘 좋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뉴스를 보면 온통 나쁜 사람이 넘쳐난다. 약방 문을 닫고 백수가 된 선생이 어느 날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양쪽 사돈 부부가 만나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초대받은 바깥사돈이 밥을 먹던 중 돌을 씹었다. 대접하던 안사돈이 깜짝 놀라 말했다.
“아이고~ 돌이 많지요?”  
그러자 바깥사돈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래도 쌀이 많습니다.”


평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작은 시민’, ‘평범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살고자 했던 선생의 세상을 보는 시선에는 이런 긍정과 낙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선생의 말마따나 좋은 사람이 더 많다. 세상을 바꿔나가는 건 거인이 아니라 평범한 작은 시민들이다.



글 : 김주완
작가. 전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 2023백상예술대상 교양 작품상을 받은 다큐 <어른 김장하> 제작에 함께했고, 『줬으면 그만이지』, 『풍운아 채현국』, 『별난 사람 별난 인생』, 『토호세력의 뿌리』 등 책을 썼다.

* 해당 원고의 의견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민주화운동기념관의 공식 의견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