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소식

민주주의 에세이당신의 삼각형 | 백승주

내 안의 인종주의자

“이(一)? 알(二)?”(1? 2?) 택시 기사가 물었다. 순간 나는 긴장한다. 숫자 1의 중국어 발음 ‘이’를 자꾸 한국어 숫자 2로 착각해서 엉뚱한 실수를 한 적이 많기 때문이다. “아, 이창!”(아, 공항 1터미널요.) 


2018년 6월 어느 날, 나는 상하이 외곽에서 택시를 타고 푸둥 공항 1터미널로 향하고 있었다. 1년간의 중국 생활을 마감하고 돌아가는 길. 택시 기사가 듣는 라디오 방송에서는 여전히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중국어 방송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제 내 몸과 마음은 한국어와는 다른 형태의 봉우리와 골짜기를 이루는 중국어의 파동을 편안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 중국에서 1년을 살았으니 나도 태어난 지 1년 된 중국 아기 정도는 하겠지. 생후 8개월이 된 아이들의 옹알이에서는 이미 모어의 억양이 녹아 나오니까. 택시가 공항 2터미널로 가는 게 아닌지 조바심을 내면서,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옹알이할 정도는 되었구나. 중국어가 만들어 내는 파동은 이제 내 몸의 일부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나는 프랑스 파리 마레 지구의 골목길을 배회하고 있었다. 나비 채집을 처음 하는 아이처럼 살짝 상기되어 거리의 낯선 소리를 채집하고 있을 때, 골목 끝에서 중국어로 대화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일순간 나의 주의는 그들의 중국어 억양에 집중되었다. 마레 지구 골목길에서 들은 중국어의 억양은 상하이에서 듣던 중국어의 억양과는 달랐다. 


굳이 말하자면 프랑스 마레 지구의 중국어라고 할 수 있을까. 중국어와 프랑스어의 억양을 미묘하게 덧댄 그들의 목소리는 도드라지지 않았고, 골목의 소리 풍경과 잘 어울렸다. 그 골목과 오랜 시간을 보냈기에 그 공간을 잘 이해하는 목소리들. 그 목소리들이 편하고 좋아서 나는 잠깐 그 목소리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몇 년 뒤 광주. 늦은 저녁 시간, 나는 집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코로나가 일상이 되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공원을 찾았다. 공원 입구 횡단보도 앞. 노년의 부부가 주거니 받거니 누군가를 흉보며 지나쳐 갔다. 자식 얘기 같았다. 그래요, 자식 흉을 부모가 안 보면 누가 보겠어요. 나는 불편하지 않았다. 공원 안 농구장. 농구하는 중학생들은 마스크가 찢어져라 상대편에게 욕하고 있었다. 친구들끼리 욕설은 일종의 우정 표현이니까.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다, 삼각형이 나를 덮쳤다. 내가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그 삼각형이.

공원 한 모퉁이를 지날 때였다. 어슴푸레한 가로등 아래 벤치에 앉아 있는 중년 남녀의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서서히 그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아는 억양. 중국어였다.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 나는 불편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다음, 나에게 닥쳐온 것은 당혹스러움이었다. 단 1초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 찰나의 순간에 내 안의 인종주의자가 섬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삼각형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삼각형은 힘이 세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은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이 아니다. 이 불편함은 치밀하게 설계된 것이다. 그것도 긴 시간에 걸친 폭력과 억압, 설득과 회유, 물적 자원을 동원한 설계. 그 설계도의 공식 명칭은 민족 국가다. 19세기에 그려진 이 설계도는 너무나 거대해서 사람들은 그것이 설계도인지도 모른다. 


이 설계도 위에는 삼각형 모양의 땅이 하나 그려져 있다. 그 땅 위에는 레고처럼 똑같은 삼각형 얼굴, 똑같은 삼각형 표정을 한 사람들이 산다. 이 사람들은 한 번도 만나본 적은 없지만 서로를 ‘우리’라고 부른다. 사람들 머리 위에는 삼각형 모양의 말풍선이 하나씩 떠 있는데, 그 말풍선에는 똑같은 삼각형 언어가 쓰여 있다. 이 삼각형 설계도는 다음의 세 꼭짓점을 이어야 한다. 하나의 영토(꼭짓점 1), 하나의 민족(꼭짓점 2), 하나의 언어(꼭짓점 3).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y)라고 폭로한 ‘민족’은 이 설계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민족은 그 구성원들이 감정적, 문화적으로 동질하다고 여기는 ‘동질 사회’를 만들어 낸다. 철학자 이졸데 카림1에게 이 동질 사회를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은 ‘자기 집’이라는 환상이다 . 여기서 자기 집이란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다. 그런데 이 환경은 같은 박자, 같은 소리로 조율된 것이기 때문에 적응할 필요 없는 ‘당연한 것’이다. 적응할 필요가 없는 당연한 환경을 제공하는 자기 집과도 같은 사회. 이 동질 사회에는 국가라는 이름이 부여된다. 이렇게 국가는 ‘자기 집’이 되고, 그 집은 우리의 정체성이 된다.


여기는 한국 땅이고요, 한국 땅에는 한국인만 살고요, 한국인들은 모두 똑같은 한국어(그러니까 표준어요.)만 말합니다. 옛날 옛날 먼 옛날부터 그랬답니다. 당연한 소리. 하지만 이 삼각형은 분명한 환상이다. 지구가 평평하다는 주장만큼이나 황당한 환상. 그러나 이 환상이 지구 평면설과 다른 점이 있다. 지구 평면설과 달리 이 환상은 너무나 잘 작동한다는 점이다. 너무나 성공적이어서 우리는 이 환상을 실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정확히는 의심 자체를 하지 않는다. 


하나의 영토, 하나의 민족, 하나의 언어. 이 성스러운 삼위일체의 환상은 ‘국어’라는 이름으로 표상된다. 그리고 국어라는 강력한 이름은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는 언어적 현실을 지운다. 더 나아가 삼위일체의 환상이 깨지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이를 어디까지나 우리의 잘못으로 돌리게 만든다. 


벌써 수십 년 전 일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를 응급실에 모시고 갔다가 난생처음 말 그대로의 통역을 한 적이 있다. 할머니는 제주말밖에 모르시는 분이었는데, 응급실 당직 의사는 강한 경상도 억양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를 가운데 두고 제주말, 서울말, 경상도 말의 쉴 새 없는 릴레이가 이어졌다. 나는 한국어에서 제주말이 가진 특수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한국이 단일하고 균질한 언어 사회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가끔 이 에피소드를 사람들에게 들려준다. 하지만 만약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가 통역이 끝난 바로 그 시점에 누군가 내게 한국의 언어에 관해 물었다면 어땠을까? 그 질문을 듣자마자 나는 방금 전 내가 경험한 언어 현실을 깨끗이 잊어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한국은 최남단 마라도까지 표준어가 사용되는 단일언어 사회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삼각형 안에 갇혀 있었으니까. 


많은 지역 방언 화자들은 표준어 화자 앞에서 자신의 방언 사용을 ‘들켰을 때’ 웃음으로 이를 무마하며 부끄러워한다. 삼각형의 은밀한 명령이다. 왜 부끄러워야 하는지 모르면서, 자신이 뭔가 해서는 안 될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집 안에 들여놓으면 안 되는 물건을 가지고 들어온 것처럼 지역 방언 화자는 자신과 자신의 말을 부끄러워한다. 반대로 표준어 화자가 지역 방언 화자에게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듯이 사투리를 고치라는 요구를 해서 논쟁거리가 되기도 한다. 


몇 년 전, 한 신문 기사는 서울의 한 대학에서 벌어진 사투리 논쟁을 소개한 적이 있다. 내용인즉슨 이렇다. 한 대학의 과 대표가 같은 과 동기에게 사투리를 고치라는 당연한 요구를 했는데 사투리를 사용하는 친구가 이를 거부하는 기막힌 일이 있었다며 그 내용을 SNS에 올린 것이다. (과 대표가 제시한 사투리를 고쳐야 하는 이유는 과 친구들이 느끼는 불편함이었다.) 과 대표는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친구야, 표준어는 고치는 게 아니야. 고쳐야 하는 건 지역 방언이란다. 지역 방언은 하나의 언어에 포함되지 않으니까.


이럴 때 지역 방언 화자는 언어와 관련해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카림의 말처럼 국가는 ‘자기 집’이다. 그런데 이 ‘자기 집’에서 당연히 사용되어야 한다/사용되고 있다고 여겨지는 말과 지역 방언 화자가 실제로 사용하는 말은 다르다. 그렇게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그렇다면 누가 잘못했을까? 지역 방언 화자 중 상당수는 자기 자신에게로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스스로를 타자화한다. 


이런 방식으로 삼각형은 지역 방언 화자가 자기 자신을 이물질이나 오염원처럼 느끼게 만든다. 지역 방언 화자는 존재하지도 않는 자신 안의 이물질과 오염을 제거하려 한다. 깨끗한 손을 자꾸 씻으려 한다. 하지만 이 땅의 모든 이들이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잘못된 전제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지 못한다.

삼각형은 힘이 세다. 


언어로 인종 만들기

국어라는 이름으로 표상되는 삼각형, 삼위일체의 법칙은 우리 사회에서 당연히 존재하는 언어적 차이를 통해 혐오하고 차별할 타자를 생산해 왔다. 드라마나 영화 속 악당들이나 찌질한 캐릭터들에게 일괄적으로 ‘배분’되는 언어들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지방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표준어를 쓰는 반면 가난하거나 웃기는 역할의 배역, 악당 역할의 배역은 방언을 쓰는 것을 우리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삼각형은 타자의 끝판왕인 인종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배제하고 제거해야 할 열등한 인종을. 인종을 만든다는 말이 황당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흔히 하는 오해와는 달리 인종이란 개념은 생물학적인 분류와는 전혀 관계없는, 담론을 통해 만들어지는 사회적 구성물이다. (20세기 초 미국 남부의 주에서 통용되던 ‘피 한 방울 법칙’에 따르면 어떤 이의 조상 중에 흑인이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는 흑인이다. 그가 ‘백인처럼’ 보일지라도. 피부색은 중요하지 않다. 인종이란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우월한 민족과 열등한 민족을 구분하는 것이다.) 


언어적 차이를 통해 인종을 만들어 낸 대표적인 사례는 제주 4.3이다. 제주 4.3이 발발한 당시 토벌대가 제주에서 마주한 현실은 ‘하나의 영토-하나의 언어-하나의 민족’이라는 성스러운 삼각형 도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토벌대는 제주도민과 한국어로 소통할 수 없었다. 소통은 오히려 일본어로 대화할 때 가능했다. 그렇게 제주도민은 같은 영토 안에서 살지만,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되었다. 


4.3 연구자 허호준2은 이런 언어적 현실이 토벌대가 제주도민을 같은 민족이 아닌 인간 이하의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 기제가 되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 하나의 영토, 다른 언어. 이해 못 할 다른 언어를 쓰는 열등한 인종들. 그러니 죄책감은 느낄 필요가 없다. 이런 인종들은 마땅히 제거되어야 한다. 성스러운 삼각형은 지켜져야 하니까. 


70여 년 전의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다. 언어를 통한 인종 만들기와 인종 차별은 지금도 일상에서 계속되고 있다. 코로나 기간 외국인 유학생의 차별 경험을 다룬 연구에서 유학생들은 이렇게 말한다 .

“엘리베이터 타면 옆에 사람 있으면 말을 안 해요. 몽골어로 옆에 남편이나 엄마, 아빠나 애랑 다 해버리잖아요, 그러면 이렇게 (째려보는 동작) 봐요. 그게 때리는 건 아닌데 때리는 것처럼 아파요, 무서워요.”

“외국어로 얘기하면 이렇게 (뒤로 몸을 빼는 동작) 하고, 지하철에서 한번 이렇게 앉아 있었는데 전화가 왔어요. 엄마한테서. 전화를 어쩔 수 없이 했는데, 내 옆에 의자에 앉아 있었던 사람이 저기 (옆을 멀리 가리키는 손짓) 가서 앉아있어요.” 

“어제도 은행에서 어떻게 됐냐면, 어학당 학생이 거길(은행에) 갔어요. 거기 가서 이렇게 “영어로 이름 써요?"(외국인 억양 흉내) 이렇게 돼서 영어로 이름 쓰고 사인하는 거 있잖아요. 어차피 발음이 안 좋아요....중략...그 친구가 나가니까 바로 소독하더라고요. 그 자리를... 중략... 똑같은 사람인데, 그럼 한국사람 쓰고 나갔을 때도 소독을 했어야지.” 3


위에서 소개한 유학생들의 경험담에는 코로나 유행 기간이라는 특수성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도 언어 차이로 촉발되는 미세 공격은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한국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피한다거나, 눈길을 주는 행위, 어색한 한국어 억양을 듣고 그 사람의 지적 수준이 낮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행위 등등 그 목록은 끝이 없다. 삼각형은 우리에게 계속 속삭인다. 쟤네 지금 성스러운 삼위일체의 법칙을 어겼어. 하나의 영토, 하나의 민족, 하나의 언어. 하나의 영토, 하나의 민족. 하나의 언어, 하나의 영토... 위반이야, 위반이야, 위반이야,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삼각형은 쉬지 않는다.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 한국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자신들만의 새로운 한국어를 만들어 가는 이들은 이런 시선의 감옥, 미세한 공격 행위의 감옥에 갇힌다. 인종 차별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행동은 ‘당신은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 ‘당신의 언어는 여기서 사용되면 안 되는 언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인종이 만들어지고 차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 사회는 차별의 감옥이 된다. 삼각형의 조건에 부합해서 자신에게 간수의 자격이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도 한국 사회는 감옥이다. 갇히는 자들이나 가두는 자들 모두에게 감옥은 감옥이기 때문이다.


모두들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국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들이 온다고. 그들의 문화도 함께 온다고. 그러니 그 문화와 함께 공존하자고. 그러나 여기에는 결정적인 조각 하나가 빠져 있다. 그 조각은 새로운 구성원들이 그들의 언어와 함께 온다는 사실이다.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 되었으니 이제 당신의 언어는 버리고 오세요. 여기서는 오직 하나의 언어만 사용할 수 있답니다. 우리는 이렇게 요구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삶과 정체성에서 그의 언어를 따로 떼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영토, 하나의 민족, 하나의 언어. 이 삼각형에 대한 이야기는 강력하고 끈질기다. 그래서 삼각형 밖에 진짜 다른 이야기가 있음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깰 때가 됐다. 당신 손에 쥐어져 있는 삼각형 모양의 지도를 버릴 때가 됐다.


세상은 삼각형이 아니다. 지구가 평평하지 않은 것처럼. 


1. 이졸데 카림(2019), 이승희 역, <나와 타자들>, 민음사.
2. 허호준(2010), <냉전 체제 형성기의 국가건설과 민간인 학살-제주4·3사건과 그리스내전의 비교를 중심으로>, 제주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3. 위의 세 인용문은 다음의 연구 논문에서 가져온 것이다. 김정숙(2021),<초국적 주체와 COVID-19: 유학생의 인종언어 이데올로기 차별경험, 정체성, 그리고 행위주체성>, 현대사회와 다문화 제11권 2호, 대구대학교 다문화사회정책연구소


글 : 백승주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한국어교육학과 사회언어학을 공부하고 가르친다. 지은 책으로는 『어느 언어학자의 문맹체류기』, 『미끄러지는 말들』이 있다. 

* 해당 원고의 의견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민주화운동기념관의 공식 의견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