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소식

민주주의 에세이민주주의, 추상적 담론에서 구체적 일상으로 | 조형근

내가 사는 동네는 경기도 외곽의 한 신도시 안에 있는 택지지구다. 신도시라고 하면 아파트의 정글을 연상하게 되지만, 이곳은 단독주택과 상가주택들이 낮고 넓게 자리 잡고 있어서 풍경이 여유롭다. 골목 생태계도 꽤 살아 있다. 동네의 자영업자이기도 한 몇몇 주민들이 상권도 살리고 좋은 마을도 가꾸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활동이 다른 주민들의 동참으로 이어지면서 10여 년 넘게 이어졌다. 


이제는 제법 활발하게 마을공동체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몇 개의 협동조합이 생겼고, 취미 모임, 공부 모임은 더 많다. 마을살이를 하다 보면 좋은 일도 많지만 힘들 때도 적지 않다. 유토피아일 리가 없다. 마을에서 겪고 배우며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이 더 깊어지는 이유다. 


마을합창단에서 배운 민주주의

2019년 11월 말, 우리 동네 합창단 ‘파노라마’가 첫 정기공연을 했을 때 일이다. 간간이 무대에 서곤 했지만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무대는 처음이었다. 단독 공연은 아니고 성미산 마을의 생협 여성 합창단 ‘선물’이 합동 공연을 제안해서 성사된 일이었다.  첫 합동 연습은 성미산 마을에서 진행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부터 연습을 시작하는데 역시나 처음에는 잘 맞지 않았다. 박자가 바뀌고 템포가 빨라지는 부분에서는 소리가 어긋나기도 했다. 어긋난 줄도 모르고 계속 노래 부르는데 지휘자가 손뼉을 치며 노래를 멈췄다. 


“여성들만 노래하다가 남자들 목소리가 합쳐지니까 참 좋죠?” 

“예, 그럼요.” 

선물 합창단원들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렇다고 서로 경쟁하시면 안 돼요.” 

“하하하.” 

“합창은 내가 잘한다고 뽐내는 게 아니고, 서로 부족한 걸 도와주는 거예요.”

“예!” 

이번에는 지휘자가 파노라마에 말을 걸었다. 


“파노라마 남성분들, 같이 노래 부르니까 좋죠?” 

“예!” 

“소리를 막 내지르면 안 돼요.” 

“하하하.” 

“남자가 얼마나 부드러워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세요.” 

“예!” 


그렇게 다시 연습이 시작됐다.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 안으로 섞여 들어가려고 애썼다. 몇 차례 합동 연습을 거친 후 맞은 본 공연에서는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운 화음이 울려 퍼졌다. 감동이었다. 그날 뒤풀이 자리에서 흥취는 절정에 달했다. 마을공동체의 연륜도, 생물학적 나이도 파노라마보다 선배 격인 선물 멤버들은 자신들이 처음 마을살이 시작하던 모습을 보는 것 같다며 우리를 응원해 주었다.


마을합창단의 경험을 통해 동네 공동체에 필요한 민주주의 원리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본다. 합창은 서로 다른 음성과 멜로디가 섞여서 어울림을 만들어 내는 작업이다. 좋은 합창곡은 각 성부 사이에 균형을 잡아주면서도 성부마다의 개별적 매력도 살려준다. 노래 부르기도 마찬가지다. 한 성부가 두드러지게 잘하면 오히려 조화가 깨진다. 


얼핏 보면 소프라노와 테너 파트가 화려해서 돋보이는 것 같지만, 중심을 잡아주는 건 알토고, 모두를 받쳐주는 건 베이스다. 단원들 개인도 다르지 않다. 노래 잘한다고 혼자 돋보이려 해서는 안 된다. 다른 이들과 목소리를 최대한 섞어야 하고, 다른 파트와 잘 어울리도록 발성해야 한다. 


우리 동네에서의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일까?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 사회에서 제도적 민주화가 조금씩 진전되어 왔다. 선거가 정상적으로 치러지고 기본적인 언론의 자유도 확보했다. 정당 간 정권 교체도 여러 차례 일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안착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거대 양당의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증오가 점점 커져서 정서적 내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확대를 비롯해서 해결해야 할 심각한 문제들 역시 한둘이 아니다. 그 어느 때보다 정치의 역할이 절실하지만, 정치 자체는 폐허가 되어 있다. 


민주주의의 심화를 위해 필요한 중차대한 과제가 많겠지만, 지역 공동체 속에서 민주주의의 원리를 체험하고 습속화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동네에서의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일까? 동네라고 해서 정당 정치의 진영 대결과 완전히 무관할 수는 없다. 동네의 일상이 정치로부터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공간은 아니다. 하지만 동네는 좁은 곳이기 때문에 오히려 좁은 의미의 정치를 넘어선 관용과 다양성이 더욱 절실히 요청된다. 



적과 이분법을 넘어 살아가는 동네의 일상

동네 공동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인간관계가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라는 점이다. 전국 단위의 정치에서는 ‘적’이든 ‘우리 편’이든 모두 만날 일 없는 추상적인 대상일 뿐이다. 증오하고 저주해도 심리적 부담이 별로 없다. 하지만 동네는 달라서 우리는 구체적인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산다. 투표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인격으로 서로를 겪게 된다. 정치 성향을 앞세우면 공동체는 금방 깨질 수밖에 없다. 몇 번 정당을 지지하는지와는 별개로 함께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들이 많다.


동네 공동체는 나와 다른 다양한 사람과 세계를 만나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지금의 동네 공동체에서는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민들을 찾기가 어렵지 않다. OECD 평균 장애인 출현율을 기준으로 삼으면 네댓 명 중에 한 명은 장애인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장애와 아픔을 이해하고 기댈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두가 동네에서는 ‘추상적 담론’이 아니라 ‘구체적 일상’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진짜 사람을 만나고 함께 일을 하며 같이 논다. 


민주주의를 위한 정교한 제도적 규칙은 없지만, 대신 한 명의 이웃도 소외되지 않아야 한다는 무언의 약속이 있다.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의견 충돌도 생기고 불화도 일어난다. 결국 사람에 대한 신뢰로 푸는 수밖에 없다. 상처를 입더라도 다른 방법은 없다. 진영론이 조장하는 적과 우리의 이분법을 넘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고 연대하는 곳이 바로 동네의 일상인 것이다. 


우리 동네 합창단 파노라마는 이번 주말, 지역의 이주노동자센터에서 열리는 미얀마 노동자 공동체의 행사에서 축하공연을 한다. 미얀마 노래 한 곡도 익혔다. <필요치 않아(아로마씨)>라는 제목의 서정적인 곡인데, 민주주의를 그리는 마음을 담고 있다. 이국에서 고국을 걱정하는 마음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면 좋겠다. 위로할 수 있다는 생각이 위로가 된다. 당신의 동네에도 서로 위로가 될 이웃이 있을 것이다. 만나서 위로가 될 방법을 찾아보자.


글 : 조형근

동네 사회학자. 협동조합 서점과 동네 합창단을 중심으로 마을살이를 하고 있다.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키워드로 읽는 불평등사회』 등의 책을 썼다. 

* 해당 원고의 의견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민주화운동기념관의 공식 의견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