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소식

민주주의 에세이역사를 기록하는 일, 연대의 불을 켜는 일 | 전혜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1987년, TV를 틀면 시위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이 나오곤 했다. 어른들은 부모님이 힘들여 대학에 보내 놓았더니 가서 ‘데모’나 하는 철없는 젊은 놈들이라며 그들을 비난했다. 어른들이 큰일 날 일처럼 말하던 그 ‘데모’는 democracy, 민주주의를 뜻하는 말이었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위한 촛불집회가 계속되던 무렵, 거리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시작하는 짧은 민중가요가 울려 퍼졌다. 어떤 사람들은 불온한 선동이라도 되는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 노래는 제목 그대로 ‘헌법 제1조’에 가락을 붙인 것뿐이었다. 


대한민국은 1919년 민주 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을 이어받아 헌법 첫 줄에서부터 우리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하는 나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여전히 불온하고 조심스러운 단어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지다 못해 축이 뒤틀려 버린 상태를 정상으로 여기는 세계에서는 민주주의를 말하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좌파라 불렸다. 이 사회의 권력은 시민에게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공정한 분배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빨갱이’라 비난받았다. 부패와 불법적인 권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때로는 체포되고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 모든 일들은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니었다. 대한민국은 시작부터 민주공화국을 꿈꾸었지만, 민주주의가 무르익는 과정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권력을 손에 넣은 독재자들은 시민의 정당한 권리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가차 없이 학살과 고문, 사법살인, 강제진압, 그리고 연좌제와 같은 국가폭력을 휘둘렀다. 


국가폭력에 억압당한 민주주의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이건 대체 무슨 일일까 하고 머리를 갸웃거렸던 일들은, 상당 부분 이와 같은 국가폭력과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아직 아기였던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광주에서 뭔가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더라”, “북한 공작원들이 내려왔다더라.”고 수군거렸다 한다. 국가가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시민들을 학살한 일에 언론들은 입을 다물었고, 진실이 덮인 위에 “빨갱이라더라”는 잘못된 낙인들이 덧입혀졌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는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쫓겨나고, 더러는 목숨을 잃었다. 아이들을 회초리로 때리지 않고, 인격을 존중하고 사랑으로 가르치자고 말했던 선생님들을, 정부와 언론에서는 그 교사들에게 사상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정권을 잡은 자들은 민주주의나 인권을 말하며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북한의 지령을 받은 끄나풀이라는 식으로 몰아세우며 때려잡기 일쑤였다. 휴전 국가였던 우리에게 반공 사상은 체제의 틀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했겠으나, 권력자들은 그 반공을 무기 삼아 휘두르며 인간의 권리를, 시민들의 손으로 만들어 가는 민주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때려눕혔다. 


나의 친구와 상사와 친척들이 겪은 비극

소설 『너의 손을 잡고서』에는 드라마 <모래시계>가 방영될 무렵 광주 민주화운동을 접하게 된 고교생과, 1980년 광주에서 고교생이었던 교사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1980년에 수도권에서 태어난 고교생 주인공이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 드라마를 통해 피상적으로만 알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나와 내 또래 친구들의 인식 역시 비슷했다. 


하지만 우리에게서 정말 가까운 곳에는, 한 다리 건너서도 아니고 직접 1980년의 광주를 겪은 분들이 계셨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광주 출신의 선생님은 드라마에 나온 것은 아주 일부일 뿐이라고 조심스럽게 말씀하신 반면, 내가 고등학생 때 공수부대 장교 출신이라던 교련 교사는 자기가 광주에서 빨갱이들과 싸웠다며 떠벌이기도 했다. 몇 년 뒤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은 자신의 가족이나 친척이 겪은 일들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지방 출신임에도 사투리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만 들어서는 고향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매끄러운 현대 서울말로. 


어디 광주뿐일까. 빨갱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격분하던 제주 출신의 상사, 그저 농사만 지었을 뿐인데 한국전쟁 중 인민군도 아닌 국군에게 학살당했던 이들,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이들과 죄 없이 끌려갈 뻔했다가 간발의 차로 위기를 모면한 이들, TV 뉴스로 보았던 1987년의 그 시위 현장에 계셨다는 교수님의 이야기, 역사책 속에 나오는 것 같았던 그 모든 비극은 한 다리 건너 남의 것이 아니었다. 불과 몇십 년 전, 내가 태어나기 전, 혹은 나의 유년기에 벌어진 역사적 비극들은 내가 아는 사람들, 나의 친구와 상사와 친척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권력의 도구가 된 국가기관

다시, 1987년. 박종철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과 구타 끝에 목숨을 잃었다. 그 1년 전에는 노동 현장 위장취업 혐의로 부천 경찰서로 연행된 권인숙이 경찰에게 성고문과 강제추행을 당했다. 그 이전인 1985년에는 김근태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 이전에, 또 이전에도, 지배 권력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폭력을 휘둘렀다. 독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인권이나 언론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을 만들면서, 국가폭력이 마치 법률로 명문화된 제도이자 치안 유지를 위한 방편인 것처럼 행세했다. 


시민들을 지켜야 할 국가기관은 권력의 도구가 되어, 민간인을 좌익, 빨갱이로 몰아 핍박하고 고문하고 살해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도 그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죄를 묻고, 저열한 말로 조롱하거나 협박해 입을 막았다. 생각해 보면 박종철의 죽음에 대해 정권이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변명했던 말은 한참 동안 유행어나 농담처럼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결코 농담거리가 될 수 없는 ‘성고문’ 같은 말을 태연히 농담으로 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극우 사이트에서는 부정적 의미로 ‘민주화’라는 말을 사용하고, 과거 전교조 운동 당시 학생들의 인격을 존중하려 했던 선생님들의 슬로건이었던 ‘참교육’이라는 말을, 마치 구타나 폭력, 혹은 크게 망신을 주는 뜻으로 사용하며 낄낄거리는 이들도 있다. 그렇게 조롱하고 왜곡하며 잘못된 일이라는 듯 몰아세우고, 입을 틀어막고 손발을 꽁꽁 묶어버리면, 모든 게 없었던 일이 된다고 믿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감추고 덮고 진실을 가리려 해도,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고문과 죽음과 공포, 부당하고 잔혹한 국가폭력의 상징과도 같았던 저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거듭나는 것을 보며,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절실하게 느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지만, 민주주의란 매번, 지금보다 더 자유롭고 평등한 이상을 추구하는 여정일 것이다. 그 여정은 초인 같은 누군가가 이끌어가는 길이 아니다. 너와 나의 손을 잡고 모두가 함께 가야 하는 길이다. 


고통받은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무너지지 않도록 서로 지탱하면서, 잊히지 않도록 기억하면서, 증거를 남기고 기록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켜진 불빛이 대한민국을 수많은 불빛으로 뒤덮었듯이. 그 빛의 물결이 끝내는 조롱과 혐오로 덮인 어두운 미망을 벗겨내고 진실의 조각들을 드러냈듯이.


글 : 전혜진

만화와 웹툰, 추리와 스릴러, 사극, SF와 사회파 호러, 논픽션 등 매체와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다. 장편소설 《280일》, 소설집 《바늘 끝에 사람이》, 《아틀란티스 소녀》 앤솔러지 《감겨진 눈 아래에》 《우리가 다른 귀신을 불러오나니》, 논픽션 《책숲 작은 집 창가에》 《여성, 귀신이 되다》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 해당 원고의 의견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민주화운동기념관의 공식 의견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