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소식

민주주의 에세이비석이 되어버린 말들 - 제주 4·3을 묻는 이들에게 | 김동현


그 무엇도 남김 없이 돌아오지도 못한 사람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1948년이나 49년, 혹은 50년. 그해 섬에서 부는 바람은 죽음의 사연을 읽어낼 여력도 없이 무정하기만 했다. 스물이었던 청춘도, 마흔이 넘은 아비도, 미처 이름을 짓지 못한 어린아이까지. 그해로부터 일흔다섯 해가 지났지만,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은 4천 명이 넘는다. 돌아오지 못한 이름들을 부르다 어미는 목울대에 피가 고여 한 세월을 살았다. 엽서 한 장으로 소식을 전했던 아비의 소식을 기다리다 아들은 아비보다 늙어 버렸다.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 위령제단 뒤쪽에는 유해도, 유품도 없는 비석이 있다. 이름과 태어난 날과 행방불명이 된 날이 전부인 비석. 4천 개의 묘비 사이를 걷다 보면 생몰년만으로 기록될 수 없었던 사연들이 눈에 박힌다. 


강위동의 자
제주읍 도련리 2276번지
1947년 출생
1949년 7월경 제주지역에서 행불 


강위동
제주읍 도련리 2276번지
1920년 5월 10일 출생
1949년 7월경 제주지역에서 행불


아비와 아들이 한날한시에 행불이 되어버린 곡절은 검은 비석으로 남았다. 사연이 깊으면 눈물도 메마른 법이라고 했던가. 사월 채 피지 못한 꽃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피고, 흘리지 못한 눈물이 다시 섬을 적신다. 그날이면 남은 사람들은 비석을 어루만지며 못다 부른 이름들은 부른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죽음을 매만지며 운다. 


하나의 사건이 아닌, 3만 번의 통곡

그해 제주 섬 곳곳, 오름마다, 해안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주검들이 쌓였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해 섬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이라고. 아니다. 그것은 비극이라는 상투적인 언어로는 차마 담을 수 없다. 


역사는 ‘1947년 3월 1일 삼일절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의 무장봉기와 진압 과정에서 3만 명이 희생된 사건’이라고 말하지만 어디 그 죽음이 3만이라는 숫자로 다 말해질 수 있을까. 그것은 3만 명이 한꺼번에 몰살된 ‘사건’이 아니다. 지극하고 오롯했던 하나하나의 생명이 3만 번이나 죽어간 3만 번의 통곡이자, 3만 번의 곡성이었다. 


그나마 주검을 수습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행운이었다. 주검조차 확인할 수 없는, 육지 형무소에서, 먼 바다 밑에서, 그리고 이름도 알 수 없는 산야에서, 끝내 되돌아오지 못한 4천여 명의 사람들.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고 죽어도 죽은 게 아니었던 그들은 끝내 차가운 비석으로만 남았다. 제주 4·3행방불명인 묘역. 남은 자들은 그곳을 이렇게 부른다.


그들의 못다 한 이야기야말로 4·3이다.

4·3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한다. 행불인 묘역을 한번 가보라고.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이 검은 비석으로 남아있는 그곳에서 잠시 눈을 감아보라고. 


어느 비 오는 오후, 혼자 행불인 묘역을 찾은 적이 있었다. 행불인 묘역이 있는 봉개동은 제주에서도 중산간이라 시내와 달리 날씨가 변덕스러운 지역이다. 어느 해 사월 추념식 날에 눈보라가 몰아친 적도 있었다. 그날도 비가 제법 내렸다. 위령제단을 지나 행불인 묘역이 내려다보이는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비가 조금 그치는가 싶더니 안개가 이내 몰려들었다. 안개는 행불인 묘역의 비석을 쓰다듬는 듯했다. 왜 하필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유해도, 유품도 없는 비석들이 마치 돌아오지 못한 4천여 명의 목숨들로 앉아있는 듯했다. 오랜 시간 구천을 떠돌다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영혼들이 하나둘씩 좌정하는 것만 같았다.


아이고, 이녁 자리는 여기라, 여기. 게난 저 먼먼 바당에서 여기까지 오잰허난 속아신게. 

아이고, 몇 해를 이러저리 떠돌아다니당 이제서야 자리를 잡아신게.

(아이고, 자네 자리는 여기라, 그러니까 저 멀고 먼 바다에서 여기까지 오려니 애썼네. 

아이고, 몇 해를 이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이제서야 자리를 잡게 되었네.) 


부산스럽게, 떠들썩하게, 수다스럽게, 칠십몇 해 동안 못다 한 사연들을 풀어놓는 그들의 이야기가 짙은 안개를 배경으로 들리는 듯했다. 환청이었을까. 환영이었을까. 지금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말들이었다. 살아있어 요란하게 떠들어야 했던 말들이었고, 살아서 마땅히 내뱉어야 했던 사연들이었다. 푸근한 살성으로 껴안고, 뒹굴어야 했을 이야기들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생몰년이 적힌 비석들이 마치 살아있는 영혼처럼 보였다. 사연 없는 죽음 없고, 까닭 없는 주검은 없는 법이다. 살아서 수다스러운 생을 살아야 했던 그들의 이야기들이야말로 4·3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에서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 동안의 비극이었다고. 나는 말한다. 4·3은 7년 7개월 동안의 비극이 아니라고. 생생한 심장으로 살아 숨 쉬어야 했을, 그들의 못다 한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한 칠십몇 해 동안의 오늘이라고. 그렇게 사월은 오늘이고, 오늘이 바로 사월이라고. 들을 수 있는 자들이 남아있는 한, 그들의 못다 한 말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우리의 의무, 그들의 말을 돌려주는 것

4·3은 죽은 자들의 비극도 아니고, 살아남은 자들의 원통도 아니다. 오롯하게 살아, 질펀한 이야기를 땅에 새겨놓아야 했던, 그들을 기억해야 하는, 우리의 오늘이다. 말을 빼앗긴 자들에게 그들의 말을 돌려줘야 하는 우리의 의무를 깨닫는 영원한 시작이다. 우리의 말이 그들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각인하는 통렬한 각성이다. 


사월에서 오월로, 오월에서 유월로, 우리의 말이 우리의 힘이 되었던 시절을 기억하는 충만한 말들이다. 그렇게 우리는 해마다 사월 행불인 묘역에서 비석이 되어버린 말들을 듣는다. 그것이 사월을 기억하는 또 하나의 말들이기 때문이다. 


4·3이 우리에게 무엇이냐고 묻거든, 행불인 묘역으로 가라. 가서 그들의 못다 한 이야기를 들어보라. 거기 사월이 있고, 거기 우리가 있다. 


글 : 김동현

문학평론가, 제주민예총 이사장. 제주와 오키나와를 시야에 두고 냉전체제와 동아시아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지역문화운동의 현장 이론가이자, 활동가로 다양한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기억이 되지 못한 말들』, 『욕망의 섬 비통의 언어』, 『제주 우리 안의 식민지』를 썼다. 

* 해당 원고의 의견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민주화운동기념관의 공식 의견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