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인권은 무엇일까?
‘민주인권’이라는 말을 처음 듣게 된다면 조금 생소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 이 말을 한번 풀어서 살펴봅시다. 바로 민주주의와 인권입니다. 둘은 사실 떨어질 수 없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선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이 전제되어야 하니까요. 여기서 잠깐 민주주의와 인권을 가장 잘 설명한 한 문장을 살펴보죠.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놀랍게도 이 문장은 하나의 문장(을 잘라서 줄인 글)입니다.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만연체에, 복잡하기만 한 이 문장의 정체는 바로 <대한민국 헌법 전문>입니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하는 대한민국의 헌법 전문은 응당 “민주주의 시스템을 바탕에 둔 인권의 보장”을 명시적으로 표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잠깐, 대체 저 한 문장은 왜 이렇게나 길어진 걸까요?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 개개인의 다양한 생각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이 과정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친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개념도 어쩜 조금 다를 수 있어요. 민주주의, 그리고 인권이란 것이 원래 그렇습니다. 뚜렷하고 확실한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모든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개념을 정립하기란 쉽지 않죠. 그럼에도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국민 개개인의 다양한 사고를 헌법이라는 교집합 안에 담아야 했고, 이렇게 긴 헌법 전문이 탄생했던 겁니다.
자, 잠시 전문의 끝부분을 유심히 봅시다.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라는 부분입니다. 저 표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쉽게 말하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민주주의 시스템은 이미 확보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꾸준히 확보'해야 할' 것이라는 뜻이겠죠. 그러니까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지금의 민주주의 시스템도 완성된 것이 아니라, ‘쟁취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의미겠습니다.
돌려 말하면, 언제든 지금의 당연함이 깨질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당연한 듯 굴러가는 민주주의 시스템 속에서, 각자의 인권에 대한 보장을 확보하기 위해, 언제 어디서나 노력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 민주인권의 시작, 4·19 혁명
그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일까요? 놀랍게도 이 또한 헌법 전문 속에 있습니다. 바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명시된 부분입니다. 쉽게 말하면 4월 19일을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출발로 공히 인정하고, 이를 계승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대체 왜 5천만 명이 넘는 대한민국 국민의 다양한 생각 속에서 찾아낸 ‘민주주의 교집합’ 속에 당당히 계승되어야 할 민주주의 이념의 출발을 4월 19일로 규정한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선 우리가 지금껏 너무도 당연해서 굳이 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이야기, 그러니까 지금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 시스템을 획득하기 위한 ‘지난한 과정’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어쩌면 이 지난한 과정에 관한 공부야말로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확보해야 할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는 출발이 될 겁니다.
헌법 전문에 명시된 4월 19일은 1960년 4월 19일을 의미합니다. 당시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이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이 한번 권력을 쥐고는 놓지 않을 방법에 골몰하던 시절이었죠. 한국전쟁이 터지고 난 뒤, 국가운영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에 대해 논쟁해야 하는 시점에, 그들은 야당과 민주세력을 탄압하는 데만 급급해하며 악수에 악수를 더하고만 있었던 겁니다. 자연스럽게 이승만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이 자행한 반민주적 행위는 다양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952년 5월 벌어진 ‘부산정치파동’입니다. ‘공산당 유격대’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계엄령을 발동하고, ‘백골단’이라고 불리던 조직을 동원해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 등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제출하고 통과시켰던 사건이었죠.
이후 1954년 9월,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하겠다 마음먹은 이승만은 ‘현 대통령에 한해서는 중임 제한을 배제한다’는 내용의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합니다. 개표 결과, 재석 의원 수 203명에 찬성 135명, 반대 60명, 기권 7명으로 개헌정족수인 2/3를 채우지 못하고 개헌에 실패했죠. 하지만 “203명의 2/3는 135.33명인데, 0.33은 자연인으로 존재할 수 없다. 소수점 이하는 삭제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사사오입 개헌’을 불법으로 통과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1958년, 제3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한 진보당 간부들을 간첩죄 혐의로 체포하고, 이틀 뒤 대선 후보였던 조봉암을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체포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체포 사유는 다름 아닌 ‘평화통일론’이었죠. 평화적인 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얼마 뒤 진보당 당수 조봉암은 사형됩니다. 이른바 ‘진보당 사건’이었습니다. 이로써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은 그야말로 완전히 붕괴합니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이미 모든 면에서 민주주의와 등을 돌렸고, 국민의 인권을 거침없이 무시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에게는 종신집권으로 향하는 일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960년 3월 15일, 운명의 정부통령선거가 시작되었죠. 선거는 ‘반(反)민주’의 끝을 보여줬습니다. 대통령과 부통령을 모두 자유당에서 차지해야 한다는 목표 속에서 어마어마한 부정이 자행되었죠.
전체 유권자의 4할 정도를 금전으로 매수해 기권을 유도하고 그 표를 미리 자유당 지지표로 만들어 투표함에 넣기도 했고, 3~5인으로 조를 구성해 자유당 선거위원에게 보여준 다음 투표하는 방식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유당 완장을 찬 사람들을 투표소에 배치해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어 압박하기도 했고, 야당이었던 민주당 측 선거 참관인을 매수하거나 폭력을 사용해 투표장 밖으로 쫓아내기도 했습니다.
선거는 너무나도 뻔하게 자유당의 승리였습니다.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그리고 부통령에는 이기붕이 압도적 지지로 당선됐죠. 하지만 그들의 영광의 순간은 그리 길지 않은,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요구가 물밀듯 밀려오기 시작했으니까요.
3월 15일 부정선거 당일, 마산에서 시작된 부정선거 반대 시위는 전국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그러던 1960년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죽은 시신 한 구가 발견되었죠. 마산 시위에 참여했던 마산상업고등학교 입학생 김주열 군의 시신이었습니다. 이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 국민은 참지 않았습니다.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을 넘어 민주주의를 요구한 어린 학생의 인권이 유린당한 사건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기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 운명의 1960년 4월 19일, 그날이 밝았을 때 서울을 비롯한 부산, 광주 등의 도시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났습니다. 대학생은 물론 중학생, 고등학생,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 가리지 않고 참가했죠. 하지만 경찰은 폭력적으로 시위대를 진압했습니다. 경찰뿐만이 아니었어요. 군도 움직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국민들의 희생은 엄청났습니다. 10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고, 1,000명이 넘는 사람이 다쳤죠. 사망자 중에는 초등학생도 있었습니다.
4월 19일 다음 날부터 시위의 불꽃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습니다. 시위 열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더 거세졌어요. 이승만과 자유당은 민주주의를 향한 엄청난 국민의 열망과 요구를 어떤 식으로든 누그러뜨려야 했습니다. 그제라도 이승만과 자유당은 스스로 부정선거를 인정하고 국민의 요구를 제대로 읽어 수습해야 했습니다.
‘승리의 화요일’로 기억되는 4월 26일 오전, 경무대 밖 대한민국 전역은 “이승만 퇴진”을 외치며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파고다 공원으로 몰려든 시위대는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쓰러뜨리고는 그 동상을 끌고 종로 거리를 누볐죠. 시위대에 의해 정권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 시민대표와 이승만은 최후의 면담을 합니다. 그리고는 그 면담 자리에서 이승만의 하야가 결정됩니다.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싸운 위대한 국민의 승리였습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완성되었을까?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1960년의 혁명은 그렇게 완성되었을까요? 아닐 겁니다. 민주주의에 완성은 없으니까요. 헌법 전문에 명시된 것처럼 여전히 우리는 민주주의를 확보해 나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1960년 그날, 민주주의를 향한 혁명이 시작되었을 뿐, 여전히 현재진행 중이라는 뜻입니다. 민주주의는 그 모습을 달리하며 끊임없이 변화했고, 진보해 왔습니다. 다양한 모양을 가진 민주주의라는 꽃은 당대의 시민사회가 바라는 핵심 이념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이념은 단 하나의 모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해 고작 60년 전, 이 땅의 국민이 반민주적 정권에 어떻게 항거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그럼 이제 스스로 질문을 던져 보세요. 지금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를 꿈꾸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그 민주주의를 확보하기 위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요?
헌법 전문 속 민주주의가 모호하면서도 어렵듯이, 민주주의는 결론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끝맺음이 있을 수도 없는 개념입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너무도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인권과 민주주의를 확보하기 위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1960년 4월 시작된 민주주의를 향한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기억해야겠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더 나은 민주주의를 향해 혁명 중에 있고, 여러분도 그 혁명의 주체 중 한 사람이니까요.
글 : 김재원
대학과 대학원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라는 모임을 만들어 팟캐스트 <역사 공작단>을 운영하고 있다. '지식 중개사'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본인 이름의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며 잊어서는 안 될 역사들을 쉽게 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공저로 《한뼘 한국사》, 《만인만색 역사 공작단》, 《쉽게 읽는 서울사: 현대 편》 등이 있다.
* 해당 원고의 의견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민주화운동기념관의 공식 의견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무엇일까?
‘민주인권’이라는 말을 처음 듣게 된다면 조금 생소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 이 말을 한번 풀어서 살펴봅시다. 바로 민주주의와 인권입니다. 둘은 사실 떨어질 수 없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선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이 전제되어야 하니까요. 여기서 잠깐 민주주의와 인권을 가장 잘 설명한 한 문장을 살펴보죠.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놀랍게도 이 문장은 하나의 문장(을 잘라서 줄인 글)입니다.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만연체에, 복잡하기만 한 이 문장의 정체는 바로 <대한민국 헌법 전문>입니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하는 대한민국의 헌법 전문은 응당 “민주주의 시스템을 바탕에 둔 인권의 보장”을 명시적으로 표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잠깐, 대체 저 한 문장은 왜 이렇게나 길어진 걸까요?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 개개인의 다양한 생각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이 과정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친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개념도 어쩜 조금 다를 수 있어요. 민주주의, 그리고 인권이란 것이 원래 그렇습니다. 뚜렷하고 확실한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모든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개념을 정립하기란 쉽지 않죠. 그럼에도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국민 개개인의 다양한 사고를 헌법이라는 교집합 안에 담아야 했고, 이렇게 긴 헌법 전문이 탄생했던 겁니다.
자, 잠시 전문의 끝부분을 유심히 봅시다.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라는 부분입니다. 저 표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쉽게 말하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민주주의 시스템은 이미 확보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꾸준히 확보'해야 할' 것이라는 뜻이겠죠. 그러니까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지금의 민주주의 시스템도 완성된 것이 아니라, ‘쟁취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의미겠습니다.
돌려 말하면, 언제든 지금의 당연함이 깨질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당연한 듯 굴러가는 민주주의 시스템 속에서, 각자의 인권에 대한 보장을 확보하기 위해, 언제 어디서나 노력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 민주인권의 시작, 4·19 혁명
그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일까요? 놀랍게도 이 또한 헌법 전문 속에 있습니다. 바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명시된 부분입니다. 쉽게 말하면 4월 19일을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출발로 공히 인정하고, 이를 계승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대체 왜 5천만 명이 넘는 대한민국 국민의 다양한 생각 속에서 찾아낸 ‘민주주의 교집합’ 속에 당당히 계승되어야 할 민주주의 이념의 출발을 4월 19일로 규정한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선 우리가 지금껏 너무도 당연해서 굳이 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이야기, 그러니까 지금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 시스템을 획득하기 위한 ‘지난한 과정’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어쩌면 이 지난한 과정에 관한 공부야말로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확보해야 할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는 출발이 될 겁니다.
헌법 전문에 명시된 4월 19일은 1960년 4월 19일을 의미합니다. 당시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이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이 한번 권력을 쥐고는 놓지 않을 방법에 골몰하던 시절이었죠. 한국전쟁이 터지고 난 뒤, 국가운영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에 대해 논쟁해야 하는 시점에, 그들은 야당과 민주세력을 탄압하는 데만 급급해하며 악수에 악수를 더하고만 있었던 겁니다. 자연스럽게 이승만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이 자행한 반민주적 행위는 다양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952년 5월 벌어진 ‘부산정치파동’입니다. ‘공산당 유격대’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계엄령을 발동하고, ‘백골단’이라고 불리던 조직을 동원해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 등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제출하고 통과시켰던 사건이었죠.
이후 1954년 9월,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하겠다 마음먹은 이승만은 ‘현 대통령에 한해서는 중임 제한을 배제한다’는 내용의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합니다. 개표 결과, 재석 의원 수 203명에 찬성 135명, 반대 60명, 기권 7명으로 개헌정족수인 2/3를 채우지 못하고 개헌에 실패했죠. 하지만 “203명의 2/3는 135.33명인데, 0.33은 자연인으로 존재할 수 없다. 소수점 이하는 삭제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사사오입 개헌’을 불법으로 통과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1958년, 제3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한 진보당 간부들을 간첩죄 혐의로 체포하고, 이틀 뒤 대선 후보였던 조봉암을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체포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체포 사유는 다름 아닌 ‘평화통일론’이었죠. 평화적인 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얼마 뒤 진보당 당수 조봉암은 사형됩니다. 이른바 ‘진보당 사건’이었습니다. 이로써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은 그야말로 완전히 붕괴합니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이미 모든 면에서 민주주의와 등을 돌렸고, 국민의 인권을 거침없이 무시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에게는 종신집권으로 향하는 일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960년 3월 15일, 운명의 정부통령선거가 시작되었죠. 선거는 ‘반(反)민주’의 끝을 보여줬습니다. 대통령과 부통령을 모두 자유당에서 차지해야 한다는 목표 속에서 어마어마한 부정이 자행되었죠.
전체 유권자의 4할 정도를 금전으로 매수해 기권을 유도하고 그 표를 미리 자유당 지지표로 만들어 투표함에 넣기도 했고, 3~5인으로 조를 구성해 자유당 선거위원에게 보여준 다음 투표하는 방식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유당 완장을 찬 사람들을 투표소에 배치해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어 압박하기도 했고, 야당이었던 민주당 측 선거 참관인을 매수하거나 폭력을 사용해 투표장 밖으로 쫓아내기도 했습니다.
선거는 너무나도 뻔하게 자유당의 승리였습니다.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그리고 부통령에는 이기붕이 압도적 지지로 당선됐죠. 하지만 그들의 영광의 순간은 그리 길지 않은,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요구가 물밀듯 밀려오기 시작했으니까요.
3월 15일 부정선거 당일, 마산에서 시작된 부정선거 반대 시위는 전국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그러던 1960년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죽은 시신 한 구가 발견되었죠. 마산 시위에 참여했던 마산상업고등학교 입학생 김주열 군의 시신이었습니다. 이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 국민은 참지 않았습니다.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을 넘어 민주주의를 요구한 어린 학생의 인권이 유린당한 사건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기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 운명의 1960년 4월 19일, 그날이 밝았을 때 서울을 비롯한 부산, 광주 등의 도시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났습니다. 대학생은 물론 중학생, 고등학생,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 가리지 않고 참가했죠. 하지만 경찰은 폭력적으로 시위대를 진압했습니다. 경찰뿐만이 아니었어요. 군도 움직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국민들의 희생은 엄청났습니다. 10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고, 1,000명이 넘는 사람이 다쳤죠. 사망자 중에는 초등학생도 있었습니다.
4월 19일 다음 날부터 시위의 불꽃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습니다. 시위 열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더 거세졌어요. 이승만과 자유당은 민주주의를 향한 엄청난 국민의 열망과 요구를 어떤 식으로든 누그러뜨려야 했습니다. 그제라도 이승만과 자유당은 스스로 부정선거를 인정하고 국민의 요구를 제대로 읽어 수습해야 했습니다.
‘승리의 화요일’로 기억되는 4월 26일 오전, 경무대 밖 대한민국 전역은 “이승만 퇴진”을 외치며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파고다 공원으로 몰려든 시위대는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쓰러뜨리고는 그 동상을 끌고 종로 거리를 누볐죠. 시위대에 의해 정권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 시민대표와 이승만은 최후의 면담을 합니다. 그리고는 그 면담 자리에서 이승만의 하야가 결정됩니다.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싸운 위대한 국민의 승리였습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완성되었을까?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1960년의 혁명은 그렇게 완성되었을까요? 아닐 겁니다. 민주주의에 완성은 없으니까요. 헌법 전문에 명시된 것처럼 여전히 우리는 민주주의를 확보해 나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1960년 그날, 민주주의를 향한 혁명이 시작되었을 뿐, 여전히 현재진행 중이라는 뜻입니다. 민주주의는 그 모습을 달리하며 끊임없이 변화했고, 진보해 왔습니다. 다양한 모양을 가진 민주주의라는 꽃은 당대의 시민사회가 바라는 핵심 이념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이념은 단 하나의 모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해 고작 60년 전, 이 땅의 국민이 반민주적 정권에 어떻게 항거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그럼 이제 스스로 질문을 던져 보세요. 지금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를 꿈꾸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그 민주주의를 확보하기 위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요?
헌법 전문 속 민주주의가 모호하면서도 어렵듯이, 민주주의는 결론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끝맺음이 있을 수도 없는 개념입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너무도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인권과 민주주의를 확보하기 위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1960년 4월 시작된 민주주의를 향한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기억해야겠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더 나은 민주주의를 향해 혁명 중에 있고, 여러분도 그 혁명의 주체 중 한 사람이니까요.
글 : 김재원
대학과 대학원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라는 모임을 만들어 팟캐스트 <역사 공작단>을 운영하고 있다. '지식 중개사'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본인 이름의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며 잊어서는 안 될 역사들을 쉽게 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공저로 《한뼘 한국사》, 《만인만색 역사 공작단》, 《쉽게 읽는 서울사: 현대 편》 등이 있다.
* 해당 원고의 의견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민주화운동기념관의 공식 의견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