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진 사람들을 위해 대신 나섰던 슈퍼스타
롯데 자이언츠는 팬들의 열성에 비해서는 보잘것없는 성적을 냈고, 무려 1992년 이후 한 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30년 무관(無冠)의 팀이다. 특히 선수들에게는 짜디짜고 팬들에게는 무심한 구단(球團)은 원성과 지탄의 대상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그래도 바깥으로만 나도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 같은 심정으로 롯데 자이언츠의 선전을 기대하는 골수팬들이 의외로 많다. 나 역시 그중 하나다. 하지만 롯데 자이언츠보다는 내 추억 속에 깊숙이 박혀 있는 자이언츠 소속 슈퍼스타에 대한 팬심이 더 크다. 그 슈퍼스타의 이름은 최동원이다.
십여 년 전 세상을 뜬 이 불세출의 투수는 1984년 한국 시리즈(당시는 코리언 시리즈라고 불렀다.)에서 무려 4승 1패라는 전무후무 상상 불가의 활약을 보이며 롯데 자이언츠를 우승대에 올렸다. 그런데 내가 아직도 ‘최동원의 롯데 자이언츠’ 팬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최동원이 펼친 초인적인 활약에 감화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중천에 떠오른 태양 같았던 슈퍼스타 최동원이, 애써 신경 두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았을 구석진 사람들을 위해 애쓰고 발버둥 쳤던 모습이 지금도 마음을 울리기 때문이다.
나의 가치를 정당하게 요구하기 위해
프로의 세계는 냉정하다고들 한다. 최동원급의 투수와 1군 입성조차 하지 못한 2군 선수와의 연봉이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반면 구석진 ‘땅의 사람들’에게도 최소한의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며, ‘프로’로서 스스로 가치를 매기고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7~80년대 대한민국에서 후자는 결코 당연하지 않았다.
선수들은 제대로 된 보호 조치도 없이 혹사에 시달렸고, 연봉 협상 테이블 위에서 큰소리치는 선수보다 손바닥 비비는 이들이 열 배는 많았다. 값비싼 장비를 제 손으로 마련하고 나면 숫제 빈털터리가 되는 후보 선수들도 부지기수였다. 어느 날 최동원은 2군 포수와 연습을 한 후, 고기를 산다. 이윽고 후배가 던진 한 마디는 최동원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고기 먹어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당대의 슈퍼스타 최동원은 그들의 처지에 가슴 아파했고, 구단의 협박 같은 연봉 협상안에 맥없이 굴복하는 동료들을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행동에 나선다. 1988년 '선수 상호 간의 친목과 복지'를 내세운 선수협의회 결성을 시도한 것이다.
최동원은 이 선수협의 산파이자 주역이었다. 인척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하고, 체육부, 노동부 등에 적법성을 문의하고, 선수들을 일일이 만나 설득하는 그 까칠하고 귀찮은 일을 도맡아 했다. 당시 최동원의 코멘트는 영화 <퍼펙트 게임>에서 최동원 역을 맡았던 배우 조승우가 멋지게 내뱉던 대사, “게임은 최동원이 끝냅니다. 이겨도 내가 끝내고 져도 내가 끝냅니다!”만큼이나 사람을 울컥하게 만든다.
“누군가가 앞장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사실 제 생각만 한다면 선수협의회 만들 일 없습니다.
어려운 동료, 불우한 후배들을 돕자는 취지에서
저같이 연봉 많이 받고 여유 있는 선수들이 앞장선 거죠.”
각 구단에서는 난리가 났다. 선수들의 부인을 협박해서 남편의 행동을 저지하도록 한 구단도 있었고, 새벽부터 구단 직원들을 출동시켜 선수들 집 앞을 지키는 해프닝도 펼쳐졌다. 어떤 구단은 아예 선수들을 사무실에 집결시켜 선수협 포기 각서를 받아냈다. ‘친목’을 내세운 선수협의회조차 허용할 수 없고, 선수협이 결성된다면 프로야구를 걷어치우겠다는 구단의 서슬 앞에서 결국 선수협은 와해되고 말았다.
선수협의회를 주동했던 최동원은 평생 벗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벗어야 했고, 머지않아 은퇴해야 했다. 이후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 최동원을 코치로 초빙하는 구단조차 거의 없었다. 심지어 그 흔한 대학, 고등학교 코치와 감독 자리도 쉽지 않았다.
한 세대의 수많은 청춘이 몸 던져 쟁취한 ‘민주화’
야구 선수 최동원은 77학번이다. 그가 대학 생활을 하고 프로야구 전성기를 보내던 무렵은 한국에서 군부 독재가 판을 치고 독점재벌의 횡포가 극에 달했던, 그리고 고도성장의 화려한 행진곡 뒤안길에서 수많은 이들이 피와 눈물과 땀을 흘리며 어둠을 헤쳐야 했던 시대였다. 또 적잖은 이들이 이 극단적인 폭압과 모순에 항거하고,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나섰던 즈음이었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하는 일이다. 주면 주는 대로 받고, 네 목을 자르겠다면 순순히 목을 내밀고, 내리누르면 다소곳이 머리 숙이고, 힘 있는 사람 앞에 그저 꿇어 엎드려야 했던 사람들로 하여금 노동의 대가를 내놓으라고 외칠 수 있게 하고, 사람 목숨 무서운 줄 알라고 호통치는 용기를 주며, 엎드린 땅 박차고 일어나 나의 권리와 존엄을 외칠 여지를 만드는 것이 민주화 투쟁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최동원 역시 ‘민주화 투쟁’의 일원이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으리라. “열여섯 꽃 같은 처녀가 매 주일 60시간 이상을 일해서 버는 한 달 치 월급보다 더 많은 우리들의 하숙비가 부끄러웠던” 서울대 78학번 유시민의 토로와 “별은 하늘에만 떠 있다고 별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밝히고 꿈이 돼 줘야 진짜 별이다.”는 연세대학교 77학번 최동원의 다짐은 그래서 닮아 있다.
그렇게 민주화 투쟁을 격렬히 벌인 세대가 사회의 주역이 되고, 최동원의 숙원이었던 선수협의회가 결성돼 활동해 온 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지금, 과연 우리 사회는 ‘민주화’되었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며, 막강한 힘 앞에서 엎드려 머리 조아리는 일 없고, 불평등과 불공정의 쌍칼에 위협받는 이들이 없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말문이 트일 수 있을까.
그 희생과 그 난리를 치르며 한 세대의 수많은 청춘이 몸 던져 쟁취한 ‘민주화’는 과연 만족스러운가 하는 질문에 떳떳할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대답은 '아니오'이다. 오히려 “우리 세대는 실패했다.”는 개탄이 나올 만큼 우리 사회의 어둠은 교묘하게 짙어졌고 모순은 정교하게 튼튼해졌다. 젊은이들은 ‘민주화 세대’가 기득권이 돼 버린 철벽 앞에서 좌절한다. 사랑을 나누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조차 무서운 세상을 우리는, 우리 사회는 만들어 버렸다.
어두운 시대에도 작은 불씨들이 큰 불꽃 되어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으로서, 한때 민주주의를 외쳤던 천만 목청 가운데 하나였으되 이미 기성세대에 편입된 지 오래인 처지로서 우리 사회의 오늘에 책임을 통감한다. 과거는 아름다웠는지 모르나 그 추억을 되새기기에는 오늘이 너무 참혹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기억한다. 저 참혹했던 거악의 시대에도 그에 저항하는 불꽃들이 줄을 잇고 최동원처럼 낮은 곳을 향하는 이들이 많았기에 우리의 희망이 만들어졌음을.
자기 이익 외에는 돌보는 것이 없고 공정을 빙자한 기득권 쟁취와 사수의 의지밖에는 강렬할 것이 없는 시대는, 그리고 그런 냉기가 지배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따뜻하고 배부른 사람들의 천국과 부족하고 아쉬운 사람들의 지옥으로 갈라지게 마련이다. 한 공간에 있으나 섞이지 않고 서로 말은 통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천국과 지옥이란 사실상 그 자체로 지옥일 뿐이다. 아무리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고, K팝과 K무비가 세계를 휩쓸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는 또 한 번 되뇐다. 이런 지옥을 깨부수는 힘은 새로운 세대에서도 화산처럼 분출돼 나오리라고.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이기심을 박차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손 내밀 줄 알고, 더 많은 사람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어깨 겯는 용기와 지혜들이 뭉쳐서 세상을 움직여 갈 것이라고. 그 세상을 보면서 저승의 최동원은, 그리고 7~80년대 우리 곁을 일찍 떠났던 민주화 영령들은 미소 지으며 악수를 나눌 것이다. “봐. 우리 짧았던 젊음이 헛된 꿈은 아니었잖아. 우리의 오랜 기다림도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잖아.
글 : 김형민
역사에 관심이 많고,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서 이야기를 찾고 풀어내기를 즐기는 역사 스토리텔러.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세계를 뒤흔든 50가지 범죄사건』, 『사랑도 발명이 되나요』, 『그들이 살았던 오늘』 등을 썼다.
* 해당 원고의 의견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민주화운동기념관의 공식 의견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구석진 사람들을 위해 대신 나섰던 슈퍼스타
롯데 자이언츠는 팬들의 열성에 비해서는 보잘것없는 성적을 냈고, 무려 1992년 이후 한 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30년 무관(無冠)의 팀이다. 특히 선수들에게는 짜디짜고 팬들에게는 무심한 구단(球團)은 원성과 지탄의 대상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그래도 바깥으로만 나도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 같은 심정으로 롯데 자이언츠의 선전을 기대하는 골수팬들이 의외로 많다. 나 역시 그중 하나다. 하지만 롯데 자이언츠보다는 내 추억 속에 깊숙이 박혀 있는 자이언츠 소속 슈퍼스타에 대한 팬심이 더 크다. 그 슈퍼스타의 이름은 최동원이다.
십여 년 전 세상을 뜬 이 불세출의 투수는 1984년 한국 시리즈(당시는 코리언 시리즈라고 불렀다.)에서 무려 4승 1패라는 전무후무 상상 불가의 활약을 보이며 롯데 자이언츠를 우승대에 올렸다. 그런데 내가 아직도 ‘최동원의 롯데 자이언츠’ 팬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최동원이 펼친 초인적인 활약에 감화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중천에 떠오른 태양 같았던 슈퍼스타 최동원이, 애써 신경 두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았을 구석진 사람들을 위해 애쓰고 발버둥 쳤던 모습이 지금도 마음을 울리기 때문이다.
나의 가치를 정당하게 요구하기 위해
프로의 세계는 냉정하다고들 한다. 최동원급의 투수와 1군 입성조차 하지 못한 2군 선수와의 연봉이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반면 구석진 ‘땅의 사람들’에게도 최소한의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며, ‘프로’로서 스스로 가치를 매기고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7~80년대 대한민국에서 후자는 결코 당연하지 않았다.
선수들은 제대로 된 보호 조치도 없이 혹사에 시달렸고, 연봉 협상 테이블 위에서 큰소리치는 선수보다 손바닥 비비는 이들이 열 배는 많았다. 값비싼 장비를 제 손으로 마련하고 나면 숫제 빈털터리가 되는 후보 선수들도 부지기수였다. 어느 날 최동원은 2군 포수와 연습을 한 후, 고기를 산다. 이윽고 후배가 던진 한 마디는 최동원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고기 먹어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당대의 슈퍼스타 최동원은 그들의 처지에 가슴 아파했고, 구단의 협박 같은 연봉 협상안에 맥없이 굴복하는 동료들을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행동에 나선다. 1988년 '선수 상호 간의 친목과 복지'를 내세운 선수협의회 결성을 시도한 것이다.
최동원은 이 선수협의 산파이자 주역이었다. 인척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하고, 체육부, 노동부 등에 적법성을 문의하고, 선수들을 일일이 만나 설득하는 그 까칠하고 귀찮은 일을 도맡아 했다. 당시 최동원의 코멘트는 영화 <퍼펙트 게임>에서 최동원 역을 맡았던 배우 조승우가 멋지게 내뱉던 대사, “게임은 최동원이 끝냅니다. 이겨도 내가 끝내고 져도 내가 끝냅니다!”만큼이나 사람을 울컥하게 만든다.
“누군가가 앞장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사실 제 생각만 한다면 선수협의회 만들 일 없습니다.
어려운 동료, 불우한 후배들을 돕자는 취지에서
저같이 연봉 많이 받고 여유 있는 선수들이 앞장선 거죠.”
각 구단에서는 난리가 났다. 선수들의 부인을 협박해서 남편의 행동을 저지하도록 한 구단도 있었고, 새벽부터 구단 직원들을 출동시켜 선수들 집 앞을 지키는 해프닝도 펼쳐졌다. 어떤 구단은 아예 선수들을 사무실에 집결시켜 선수협 포기 각서를 받아냈다. ‘친목’을 내세운 선수협의회조차 허용할 수 없고, 선수협이 결성된다면 프로야구를 걷어치우겠다는 구단의 서슬 앞에서 결국 선수협은 와해되고 말았다.
선수협의회를 주동했던 최동원은 평생 벗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벗어야 했고, 머지않아 은퇴해야 했다. 이후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 최동원을 코치로 초빙하는 구단조차 거의 없었다. 심지어 그 흔한 대학, 고등학교 코치와 감독 자리도 쉽지 않았다.
한 세대의 수많은 청춘이 몸 던져 쟁취한 ‘민주화’
야구 선수 최동원은 77학번이다. 그가 대학 생활을 하고 프로야구 전성기를 보내던 무렵은 한국에서 군부 독재가 판을 치고 독점재벌의 횡포가 극에 달했던, 그리고 고도성장의 화려한 행진곡 뒤안길에서 수많은 이들이 피와 눈물과 땀을 흘리며 어둠을 헤쳐야 했던 시대였다. 또 적잖은 이들이 이 극단적인 폭압과 모순에 항거하고,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나섰던 즈음이었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하는 일이다. 주면 주는 대로 받고, 네 목을 자르겠다면 순순히 목을 내밀고, 내리누르면 다소곳이 머리 숙이고, 힘 있는 사람 앞에 그저 꿇어 엎드려야 했던 사람들로 하여금 노동의 대가를 내놓으라고 외칠 수 있게 하고, 사람 목숨 무서운 줄 알라고 호통치는 용기를 주며, 엎드린 땅 박차고 일어나 나의 권리와 존엄을 외칠 여지를 만드는 것이 민주화 투쟁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최동원 역시 ‘민주화 투쟁’의 일원이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으리라. “열여섯 꽃 같은 처녀가 매 주일 60시간 이상을 일해서 버는 한 달 치 월급보다 더 많은 우리들의 하숙비가 부끄러웠던” 서울대 78학번 유시민의 토로와 “별은 하늘에만 떠 있다고 별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밝히고 꿈이 돼 줘야 진짜 별이다.”는 연세대학교 77학번 최동원의 다짐은 그래서 닮아 있다.
그렇게 민주화 투쟁을 격렬히 벌인 세대가 사회의 주역이 되고, 최동원의 숙원이었던 선수협의회가 결성돼 활동해 온 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지금, 과연 우리 사회는 ‘민주화’되었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며, 막강한 힘 앞에서 엎드려 머리 조아리는 일 없고, 불평등과 불공정의 쌍칼에 위협받는 이들이 없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말문이 트일 수 있을까.
그 희생과 그 난리를 치르며 한 세대의 수많은 청춘이 몸 던져 쟁취한 ‘민주화’는 과연 만족스러운가 하는 질문에 떳떳할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대답은 '아니오'이다. 오히려 “우리 세대는 실패했다.”는 개탄이 나올 만큼 우리 사회의 어둠은 교묘하게 짙어졌고 모순은 정교하게 튼튼해졌다. 젊은이들은 ‘민주화 세대’가 기득권이 돼 버린 철벽 앞에서 좌절한다. 사랑을 나누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조차 무서운 세상을 우리는, 우리 사회는 만들어 버렸다.
어두운 시대에도 작은 불씨들이 큰 불꽃 되어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으로서, 한때 민주주의를 외쳤던 천만 목청 가운데 하나였으되 이미 기성세대에 편입된 지 오래인 처지로서 우리 사회의 오늘에 책임을 통감한다. 과거는 아름다웠는지 모르나 그 추억을 되새기기에는 오늘이 너무 참혹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기억한다. 저 참혹했던 거악의 시대에도 그에 저항하는 불꽃들이 줄을 잇고 최동원처럼 낮은 곳을 향하는 이들이 많았기에 우리의 희망이 만들어졌음을.
자기 이익 외에는 돌보는 것이 없고 공정을 빙자한 기득권 쟁취와 사수의 의지밖에는 강렬할 것이 없는 시대는, 그리고 그런 냉기가 지배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따뜻하고 배부른 사람들의 천국과 부족하고 아쉬운 사람들의 지옥으로 갈라지게 마련이다. 한 공간에 있으나 섞이지 않고 서로 말은 통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천국과 지옥이란 사실상 그 자체로 지옥일 뿐이다. 아무리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고, K팝과 K무비가 세계를 휩쓸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는 또 한 번 되뇐다. 이런 지옥을 깨부수는 힘은 새로운 세대에서도 화산처럼 분출돼 나오리라고.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이기심을 박차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손 내밀 줄 알고, 더 많은 사람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어깨 겯는 용기와 지혜들이 뭉쳐서 세상을 움직여 갈 것이라고. 그 세상을 보면서 저승의 최동원은, 그리고 7~80년대 우리 곁을 일찍 떠났던 민주화 영령들은 미소 지으며 악수를 나눌 것이다. “봐. 우리 짧았던 젊음이 헛된 꿈은 아니었잖아. 우리의 오랜 기다림도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잖아.
글 : 김형민
역사에 관심이 많고,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서 이야기를 찾고 풀어내기를 즐기는 역사 스토리텔러.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세계를 뒤흔든 50가지 범죄사건』, 『사랑도 발명이 되나요』, 『그들이 살았던 오늘』 등을 썼다.
* 해당 원고의 의견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민주화운동기념관의 공식 의견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