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라틴아메리카 핑크타이드, 기후 위기와 민주주의 후퇴에 맞서다
들어가는 글: 라틴아메리카의 위기, 우리에게 말을 걸다
2011년 한국인 청년 리오(필명)가 멕시코 반군세력이 있는 치아파스의 한 농장에 현장 연구를 갔을 때, 멕시코는 친미적 시장경제 정책을 강조하고 특히 에너지 부문의 민간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우파 국민행동당이 집권하고 있었다. 미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곡물회사 카길을 비롯한 거대 기업이 멕시코 곡물시장을 장악하고 있었고 일정가격 이상은 수매를 해주지 않는 등 횡포 속에 농민들은 옥수수 재배로 1년 순수익 200달러를 손에 쥐었다. 좀처럼 남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는 마초 멕시코 농부가 뼈가 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이 모양이라며 아이처럼 울었다. 이 농부들이 인권을 가지려면 전 세계가 바뀌어야 함을 깨닫고 그는 절망했다. 브라질 원주민 선교사 친척이 있었기에 낯설지 않은 대륙이었던 라틴아메리카는 그에게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평생의 질문을 안겨주었다. 2011년은 참고로 브라질에서는 룰라의 집권 시기(2003~2010)가 끝나고 우파가 집권한 해였다.
최근 아르헨티나에서 일하고 있는 한인 동포 2세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최악의 인플레이션과 가치 절하, 기준금리 75%에 10여 개 각기 다른 환율이 적용되는 혼돈에 찬 금융 상황을 설명하며 괴로움을 토로했다. 우파 정부와 좌파 정부가 번갈아 들어서면서 정책도 민심도 요동을 치고 있다면서 G20의 국가여서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어려운 때 국제원조를 받지도 못한다며 ‘가난한 민주주의’라고 자조했다. 좌파 우파 막론하고 사회를 개혁하면서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음을 절감하게 했다.
‘라틴아메리카에 살았던 경험으로는, 좌파든 우파든 동일한 추출주의(각주1)와 동일한 인권유린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모든 정부가 자원을 팔고 있기 때문에 나는 라틴아메리카의 민주주의에 대해 완전히 기대를 상실했다. 좌파든 우파든 상관없이 그들이 감옥에 가기 전까지 가능한 한 빨리 최대한의 이익을 취하려고 한다. 아 물론 일이 잘못되면 항상 이전 정부의 탓을 한다.’ 볼리비아의 한 기후 운동가가 지난 11월 소셜네트워크에 올린 직설적인 글이다. 지구상 어느 국가보다 많은 200번 이상의 쿠데타가 일어난 나라 볼리비아는 2020년 10월 ‘사회주의로의 운동’(MAS)의 루이스 아르세 대통령을 선출했다.
한국 청년 리오에게 세계시민으로서의 자각을 일깨운 멕시코 농부의 고단한 삶, 단일한 환율체계가 적용되는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는 상상조차 힘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래서 얼마 전 막을 내린 월드컵 승리에 전 국민들이 환호하고 눈물 흘렸던 아르헨티나, 우리에게도 익숙한 양비론적 언사를 회의적인 태도로 이야기하는 볼리비아 활동가의 직설은 어쩐지 서로 별개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한반도로부터 물리적 심리적으로 멀게만 느껴져온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과거와 현재에서 우리는 무엇을 들여다보고 무엇을 반추할 수 있을까.
2023년 1월 1일 브라질에서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가 12년 만에 다시 대통령에 취임했다. 2010년대 중남미 지역 좌파 연대를 이끌었던 그는 12년 만에 다시 남미 동맹을 가속화할 예정이다. ‘오늘날 우리가 다른 나라의 이야기들을 알아야 하는 것은 다만, 이제 지구 위의 모든 이들이 같은 위기의 시간을 살며 같은 과제를 풀어 나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글로벌경제연구소 장석준 소장의 말에 공감하면서 한국 상황을 염두에 두고 라틴아메리카의 현재를 브라질 사례를 통해 톺아보고자 한다.
라틴아메리카의 붉은 물결
2019년 아르헨티나와 쿠바를 필두로 2020년 볼리비아, 2021년 온두라스, 니카라과, 페루, 칠레, 그리고 2022년 콜럼비아와 브라질에 이르기까지 라틴아메리카에 좌파 정부가 속속 들어섰다. 쿠바는 2019년 좌파 미누엘 디아즈 카넬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021년 12월 칠레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정당연합 '존엄을 인준하라' 소속 가브리엘 보리치 후보가 극우파 호세 카스트 후보를 누르고 승리, 볼리비아에서는 모랄레스의 후계자 루이스 아르세가 2020년 대선에서 압승, 페루에서도 2021년 급진좌파 성향의 페드로 카스티요가 대통령에 당선, 멕시코에도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이끄는 좌파 성향 정부가 들어서 있다.
아르헨티나는 좌파인 페론당이 집권하다 2014년 우파가 집권 후 자유 환율제를 적용하면서 경제적 혼란이 커졌고, 다시 2019년 이후 현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좌파가 집권하고 있다. 90년대 말 제1차 좌파 붐 와중에도 중남미 우파의 버팀목으로 남아 있었으며 2000년대 초까지도 보수당과 자유당이라는 전통적 양대 정당이 양분, 부패한 양당 독점 정치 아래에서 좌파게릴라 활동과 마약카르텔이 성장했던 콜럼비아에서 2022년 좌파게릴라 출신의 구스타보 페트로가 당선되며 역사상 최초로 좌파 대통령이 집권했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좌파 물결을 이끌었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전 대통령이 2022년 10월 브라질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중남미의 제2차 좌파 붐에 결정적인 의미를 가져오게 되었다.
The LEFT rises in Latin America. 출처: Worker Unity
핑크 타이드
1990년대 말 베네수엘라를 시작으로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 정부가 사회안전망 확대와 빈부격차 개선 등 분배 정책을 도입하면서 좌파 정치로 변화했는데, 당시 언론에서는 그런 중남미 정치 구도를 '핑크 타이드'(분홍색 물결)(각주2)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남미 여러나라에서 소득불평등 악화 및 부유층과 서민간 갈등 심화는 정치 불안정을 야기했고 이는 경제개혁 요구로 분출되었다. 무역개방 등 신자유주의적 우파 정책에 불만을 가진 국내 기업들이 국내산업보호를 공통분모로 좌파 정당과 정치적 연합을 구축했는데, 브라질의 경우 룰라(2002-2009) 및 딜마(2010-2016) 좌파 정부가 의회내 중도 및 온건 우파 소속 7~10개의 정당과 연대를 구축하며 '핑크'라는 개혁적 사회주의를 표방하게 되었다. (각주3) 이후 경제 어려움이 가속화되면서 우파 정권이 득세했던 중남미에서 다시 좌파가 커지기 시작한 것이 2010년대 후반이다. 최근의 좌파 정권 등장은 그래서 핑크 타이드 2라 불리기도 한다. 2차 핑크 타이드는 산업구조 다변화와 녹색성장을 위시한 신성장 전략과 빈곤층의 교육기회 확대로 중남미의 근본적 사회구조를 바꾸려고 하는 점에서 1차와 확연히 다르다. 또한 성평등과 성소수자의 권리 증진에 우호적인 진보성향을 갖고 있다.(각주4)
그러나 글 앞머리에서 볼리비아 환경운동가의 직설에서 짐작되듯 체제와 정치의 문제, 즉 높은 인플레이션과 정치적 양극화, 정책의 혼란 등으로 좌파 정권이든 우파 정권이든 ‘자원침탈’ 또는 ‘기후위기’에 상이한 방식으로 영향을 주었고, 이는 결국 남미 원주민 그리고 지구 다른 지역 사람들의 생존권으로서의 인권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글에서는 라틴아메리카의 경제구조와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 사례를 통해 극한의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무절제하게 자행된 환경파괴와 자원수탈이 전 지구적인 기후위기를 가속화해왔고, 이 파괴적 행위가 시민들 특히 원주민들의 인권을 극도로 침해해 온 사실을 들여다보고 한국사회에 주는 시사점을 생각해본다.
신자유주의 실험장 라틴아메리카
라틴아메리카에는 식민지 시대부터 이어져 온 대토지소유제와 부의 집중이 심각했고 이는 신자유주의 실험에서 더욱 악화되었다. 브라질은 상위 3%가 전체 농경지의 60%를 소유하고 있고, 전체 국민의 44%가 하루 2달러 이하의 저소득층이다. 좌파의 등장 배경에는 미국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 미국의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간에 상호 불간섭을 주장한 먼로주의라는 외교적 고립정책 등의 원인이 있다. 소련과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는다는 구실이었지만, 인권을 침해하고 부를 독점한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졌고, 산업구조는 미국의 주도대로 단순화되었다. 바나나만 생산하는 중미 ‘바나나 공화국’이나 커피만 생산했던 브라질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각주5)
미국의 자원추출 횡포에서 벗어나고자 그동안 기술과 자본 부족 등으로 해외 기업에 리튬 개발과 채굴을 맡기고 세금을 징수해 오던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는 국유화 혹은 직접 개발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치 않다. 그 배후에는 미국 패권주의 그늘에서 영향력을 키워 온 중국의 투자가 버티고 있다. 20세기 이후 중남미의 자원을 추출해간 미국에 이어 중국이 다각적 투자는 물론,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중남미 여러 나라에 백신 지원과 공동 생산 등 코로나 외교를 펼쳐왔다. 녹색에너지 전환의 열쇠인 리튬 최대 원산지, 남미 리튬 삼각지에 중국은 일찌감치 터를 닦았다. 인권, 환경, 원주민, 소수자 등 사회적 과제가 많지만 경제 상황은 이러한 사회적 과제를 자꾸만 뒤로 두게 만든다. 미국최대투자사는 중남미 대부분, 특히 새 정부를 맞이한 칠레, 콜롬비아, 브라질의 재정난을, 유엔은 아이티, 베네수엘라, 과테말라, 니카라과의 극심한 식량난을 예측했다.(각주6)
이런 상황에서 좌파정부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좌파정부는 원주민 권리 옹호(각주7)와 페미니즘 강화, 환경 보호 등을 골자로 한 정책을 펴고 있다. 좌파정부의 주요 정책 중 하나는 기후 위기에 맞서 새로운 에너지 체제로 전환하는 것이고, '에너지 전환'이라는 이름 아래 북반구 국가들이 남반구에 강요하는 자원 추출 중심 경제를 극복하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좌파정부를 포퓰리즘이라 비판하는 시각도 있고, ‘까유딜료 정치(Caudillismo)’라 하여 힘센 자가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에서 비롯된 문제(아르헨티나 페론당)로 비판하는 시각도 있지만, 자원추출 중심 경제를 극복하기 위해 부유국가들에 기후위기의 책임을 묻고 있는 브라질의 룰라 정권을 위시한 좌파정부의 움직임은 브라질 민중과 전세계 기후정의를 외치는 시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다.
한편 정권의 민주성은 환경정책과도 연관성이 있는데, 호주에 본부를 둔 경제평화연구소(IPE)의 환경위기 보고서에 의하면 권위주의국가인 중국 인도 러시아에서는 기후위기 관심도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사회적 복원력이 떨어지는 이러한 국가들에서 사회갈등이 깊어지고 있는 상황이고 특히 이 보고서에서는 남미 베네주엘라처럼 환경문제와 국내분쟁 이슈가 연결되어있는 국가의 경우도 그렇고 전세계적으로 평화와 갈등, 기후위기와 생태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각주8)
브라질 원주민 지역 야노마미(Yanomami) 마을의 채굴 현장. © 치코 바타타 / 그린피스 (그린피스 웹사이트)
[세계 민주인권을 보는 8개의 시선]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벌어지는 '민주주의와 인권 위기'을 목도하며 8명의 필자가 고민과 성찰을 나눕니다.
글 : 정순영 (Social Link Service Lab #SLSL 슬슬 대표, 자유연구가)
* 해당 원고의 의견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민주인권기념관의 공식 의견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각주1. - 추출주의 (Extractivism): 세계 시장에 판매하기 위해 지구에서 천연 자원을 추출하는 과정이다. 주로 전 세계적으로 수출에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천연 자원의 추출 또는 제거에 의존하는 경제에서 발생한다.
- 추출경제 : 종속이론에 기반해 잉여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 의해 저발전국으로부터 추출된다고 보는 경제론. 천연자원은 물론 자본마저도 끊임없이 추출해 부의 집중을 가져가는 현재의 경제 시스템을 일컬음.
- 종속이론 : 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3...
심화 참고 : ‘어떻게 추출(extractive) 경제에서 생성(generative) 경제로 나아갈 것인가?’
(저자 : David Bollier, 원문 : “How to Move from an Extractive to a Generative Economy?” (2017.2.2) /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ce)
각주2. '핑크 타이드'(분홍색 물결)에 대해서는 https://en.wikipedia.org/wiki/Pink_tide 등을 참조.
각주3. https://overseas.mofa.go.kr/br-ko/brd/m_6112/view.do?seq=1345956
각주4. https://brunch.co.kr/@hsk4243/83
각주5. http://klsi.org/bbs/board.php?bo_table=B07&wr_id=1109
각주6. 중남미와 깐부 되기: https://m.hankookilbo.com/News/Read/A2022012110120003144?rPrev=A2022032510540005517
각주7. 원주민 권리 옹호 - ‘라틴아메리카원주민 인권'' 2005: http://www.ajlas.org/v2006/paper/2005vol18no304.pdf
‘1980년대 이래 원주민 개념정의는 사회적 성격보다는 인종적 성격에 보다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이러한 개념 규정에 따르면 원 . 주민을 분류하는 특징으로 공동의 지리적 기원 신체적 특징 언어, 종교 관습 민속 음식 정치사회조직 공동경작지 등을 들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 전체 5억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게는 6% 많게는 9% 정도이고 인구수 로 보면 3천만에서 4천 5백만 정도로 추정된다.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은 19세기 20세기 두 세기에 걸친 지속적인 원주민 말살정책과 통합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심지어 80년대까지 감소세였던 원주민의 수가 최근에는 오히려 점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원주민은 역사적으로 가장 빈곤하고 가장 소외 된 사회계층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토지 언어 문화 통치형태와 같은 기본적 권리에서 뿐만 아니라 교육이나 보건 상하수도 등등의 사회적 서비스에서도 심한 차별을 겪어왔다. 원주민들은 제 2의 계 급으로서 경제적 교육적 기회조차도 박탈당했다. 특히 신자유주의가 사회복지에 있어서 탈중앙집권주의를 적용함 에 따라 원주민들의 소외는 보다 심화되었다. 그나마 포퓰리즘 체제하에서 주어졌던 최소한의 사회복지마저도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는 여지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자유주의 개인주의에 따라 원주민 공동체의 공동 소유 토지가 개인에게 분배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원주민들의 개별 소유 토지가 상업적 작물을 재배하기 위한 토지집중 과정을 용이롭게 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원주민의 공동경작 토지를 보호하기 위한 토지의 집합적 소유권 인정이 원주민 인권의 가장 중요한 이슈중 하나로 등장했다.’
‘원주민들의 정치적 대표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원주민 운동 단체들에 의해 제기되는 것이 바로 자치성의 개념이다. 1970년대 원주민 운동이 출현한 이래 원주민 조직들은 지속적으로 국제법에 기반을 둔 자결권(self-determination) 을 요구하고 있다. 원주민운동의 리더들은 소수권(minority rights) 에 기초를 둔 다양한 요구들이 자결권의 요구와 상반되는 통합정책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요구는 소수권이 아닌 자결권 자치권이라고 주장한다.’
각주8. https://www.visionofhumanity.org/wp-content/uploads/2022/10/ETR-2022-Web-V1.pdf
1. 라틴아메리카 핑크타이드, 기후 위기와 민주주의 후퇴에 맞서다
들어가는 글: 라틴아메리카의 위기, 우리에게 말을 걸다
2011년 한국인 청년 리오(필명)가 멕시코 반군세력이 있는 치아파스의 한 농장에 현장 연구를 갔을 때, 멕시코는 친미적 시장경제 정책을 강조하고 특히 에너지 부문의 민간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우파 국민행동당이 집권하고 있었다. 미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곡물회사 카길을 비롯한 거대 기업이 멕시코 곡물시장을 장악하고 있었고 일정가격 이상은 수매를 해주지 않는 등 횡포 속에 농민들은 옥수수 재배로 1년 순수익 200달러를 손에 쥐었다. 좀처럼 남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는 마초 멕시코 농부가 뼈가 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이 모양이라며 아이처럼 울었다. 이 농부들이 인권을 가지려면 전 세계가 바뀌어야 함을 깨닫고 그는 절망했다. 브라질 원주민 선교사 친척이 있었기에 낯설지 않은 대륙이었던 라틴아메리카는 그에게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평생의 질문을 안겨주었다. 2011년은 참고로 브라질에서는 룰라의 집권 시기(2003~2010)가 끝나고 우파가 집권한 해였다.
최근 아르헨티나에서 일하고 있는 한인 동포 2세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최악의 인플레이션과 가치 절하, 기준금리 75%에 10여 개 각기 다른 환율이 적용되는 혼돈에 찬 금융 상황을 설명하며 괴로움을 토로했다. 우파 정부와 좌파 정부가 번갈아 들어서면서 정책도 민심도 요동을 치고 있다면서 G20의 국가여서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어려운 때 국제원조를 받지도 못한다며 ‘가난한 민주주의’라고 자조했다. 좌파 우파 막론하고 사회를 개혁하면서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음을 절감하게 했다.
‘라틴아메리카에 살았던 경험으로는, 좌파든 우파든 동일한 추출주의(각주1)와 동일한 인권유린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모든 정부가 자원을 팔고 있기 때문에 나는 라틴아메리카의 민주주의에 대해 완전히 기대를 상실했다. 좌파든 우파든 상관없이 그들이 감옥에 가기 전까지 가능한 한 빨리 최대한의 이익을 취하려고 한다. 아 물론 일이 잘못되면 항상 이전 정부의 탓을 한다.’ 볼리비아의 한 기후 운동가가 지난 11월 소셜네트워크에 올린 직설적인 글이다. 지구상 어느 국가보다 많은 200번 이상의 쿠데타가 일어난 나라 볼리비아는 2020년 10월 ‘사회주의로의 운동’(MAS)의 루이스 아르세 대통령을 선출했다.
한국 청년 리오에게 세계시민으로서의 자각을 일깨운 멕시코 농부의 고단한 삶, 단일한 환율체계가 적용되는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는 상상조차 힘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래서 얼마 전 막을 내린 월드컵 승리에 전 국민들이 환호하고 눈물 흘렸던 아르헨티나, 우리에게도 익숙한 양비론적 언사를 회의적인 태도로 이야기하는 볼리비아 활동가의 직설은 어쩐지 서로 별개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한반도로부터 물리적 심리적으로 멀게만 느껴져온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과거와 현재에서 우리는 무엇을 들여다보고 무엇을 반추할 수 있을까.
2023년 1월 1일 브라질에서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가 12년 만에 다시 대통령에 취임했다. 2010년대 중남미 지역 좌파 연대를 이끌었던 그는 12년 만에 다시 남미 동맹을 가속화할 예정이다. ‘오늘날 우리가 다른 나라의 이야기들을 알아야 하는 것은 다만, 이제 지구 위의 모든 이들이 같은 위기의 시간을 살며 같은 과제를 풀어 나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글로벌경제연구소 장석준 소장의 말에 공감하면서 한국 상황을 염두에 두고 라틴아메리카의 현재를 브라질 사례를 통해 톺아보고자 한다.
라틴아메리카의 붉은 물결
2019년 아르헨티나와 쿠바를 필두로 2020년 볼리비아, 2021년 온두라스, 니카라과, 페루, 칠레, 그리고 2022년 콜럼비아와 브라질에 이르기까지 라틴아메리카에 좌파 정부가 속속 들어섰다. 쿠바는 2019년 좌파 미누엘 디아즈 카넬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021년 12월 칠레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정당연합 '존엄을 인준하라' 소속 가브리엘 보리치 후보가 극우파 호세 카스트 후보를 누르고 승리, 볼리비아에서는 모랄레스의 후계자 루이스 아르세가 2020년 대선에서 압승, 페루에서도 2021년 급진좌파 성향의 페드로 카스티요가 대통령에 당선, 멕시코에도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이끄는 좌파 성향 정부가 들어서 있다.
아르헨티나는 좌파인 페론당이 집권하다 2014년 우파가 집권 후 자유 환율제를 적용하면서 경제적 혼란이 커졌고, 다시 2019년 이후 현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좌파가 집권하고 있다. 90년대 말 제1차 좌파 붐 와중에도 중남미 우파의 버팀목으로 남아 있었으며 2000년대 초까지도 보수당과 자유당이라는 전통적 양대 정당이 양분, 부패한 양당 독점 정치 아래에서 좌파게릴라 활동과 마약카르텔이 성장했던 콜럼비아에서 2022년 좌파게릴라 출신의 구스타보 페트로가 당선되며 역사상 최초로 좌파 대통령이 집권했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좌파 물결을 이끌었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전 대통령이 2022년 10월 브라질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중남미의 제2차 좌파 붐에 결정적인 의미를 가져오게 되었다.
The LEFT rises in Latin America. 출처: Worker Unity
핑크 타이드
1990년대 말 베네수엘라를 시작으로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 정부가 사회안전망 확대와 빈부격차 개선 등 분배 정책을 도입하면서 좌파 정치로 변화했는데, 당시 언론에서는 그런 중남미 정치 구도를 '핑크 타이드'(분홍색 물결)(각주2)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남미 여러나라에서 소득불평등 악화 및 부유층과 서민간 갈등 심화는 정치 불안정을 야기했고 이는 경제개혁 요구로 분출되었다. 무역개방 등 신자유주의적 우파 정책에 불만을 가진 국내 기업들이 국내산업보호를 공통분모로 좌파 정당과 정치적 연합을 구축했는데, 브라질의 경우 룰라(2002-2009) 및 딜마(2010-2016) 좌파 정부가 의회내 중도 및 온건 우파 소속 7~10개의 정당과 연대를 구축하며 '핑크'라는 개혁적 사회주의를 표방하게 되었다. (각주3) 이후 경제 어려움이 가속화되면서 우파 정권이 득세했던 중남미에서 다시 좌파가 커지기 시작한 것이 2010년대 후반이다. 최근의 좌파 정권 등장은 그래서 핑크 타이드 2라 불리기도 한다. 2차 핑크 타이드는 산업구조 다변화와 녹색성장을 위시한 신성장 전략과 빈곤층의 교육기회 확대로 중남미의 근본적 사회구조를 바꾸려고 하는 점에서 1차와 확연히 다르다. 또한 성평등과 성소수자의 권리 증진에 우호적인 진보성향을 갖고 있다.(각주4)
그러나 글 앞머리에서 볼리비아 환경운동가의 직설에서 짐작되듯 체제와 정치의 문제, 즉 높은 인플레이션과 정치적 양극화, 정책의 혼란 등으로 좌파 정권이든 우파 정권이든 ‘자원침탈’ 또는 ‘기후위기’에 상이한 방식으로 영향을 주었고, 이는 결국 남미 원주민 그리고 지구 다른 지역 사람들의 생존권으로서의 인권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글에서는 라틴아메리카의 경제구조와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 사례를 통해 극한의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무절제하게 자행된 환경파괴와 자원수탈이 전 지구적인 기후위기를 가속화해왔고, 이 파괴적 행위가 시민들 특히 원주민들의 인권을 극도로 침해해 온 사실을 들여다보고 한국사회에 주는 시사점을 생각해본다.
신자유주의 실험장 라틴아메리카
라틴아메리카에는 식민지 시대부터 이어져 온 대토지소유제와 부의 집중이 심각했고 이는 신자유주의 실험에서 더욱 악화되었다. 브라질은 상위 3%가 전체 농경지의 60%를 소유하고 있고, 전체 국민의 44%가 하루 2달러 이하의 저소득층이다. 좌파의 등장 배경에는 미국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 미국의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간에 상호 불간섭을 주장한 먼로주의라는 외교적 고립정책 등의 원인이 있다. 소련과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는다는 구실이었지만, 인권을 침해하고 부를 독점한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졌고, 산업구조는 미국의 주도대로 단순화되었다. 바나나만 생산하는 중미 ‘바나나 공화국’이나 커피만 생산했던 브라질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각주5)
미국의 자원추출 횡포에서 벗어나고자 그동안 기술과 자본 부족 등으로 해외 기업에 리튬 개발과 채굴을 맡기고 세금을 징수해 오던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는 국유화 혹은 직접 개발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치 않다. 그 배후에는 미국 패권주의 그늘에서 영향력을 키워 온 중국의 투자가 버티고 있다. 20세기 이후 중남미의 자원을 추출해간 미국에 이어 중국이 다각적 투자는 물론,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중남미 여러 나라에 백신 지원과 공동 생산 등 코로나 외교를 펼쳐왔다. 녹색에너지 전환의 열쇠인 리튬 최대 원산지, 남미 리튬 삼각지에 중국은 일찌감치 터를 닦았다. 인권, 환경, 원주민, 소수자 등 사회적 과제가 많지만 경제 상황은 이러한 사회적 과제를 자꾸만 뒤로 두게 만든다. 미국최대투자사는 중남미 대부분, 특히 새 정부를 맞이한 칠레, 콜롬비아, 브라질의 재정난을, 유엔은 아이티, 베네수엘라, 과테말라, 니카라과의 극심한 식량난을 예측했다.(각주6)
이런 상황에서 좌파정부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좌파정부는 원주민 권리 옹호(각주7)와 페미니즘 강화, 환경 보호 등을 골자로 한 정책을 펴고 있다. 좌파정부의 주요 정책 중 하나는 기후 위기에 맞서 새로운 에너지 체제로 전환하는 것이고, '에너지 전환'이라는 이름 아래 북반구 국가들이 남반구에 강요하는 자원 추출 중심 경제를 극복하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좌파정부를 포퓰리즘이라 비판하는 시각도 있고, ‘까유딜료 정치(Caudillismo)’라 하여 힘센 자가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에서 비롯된 문제(아르헨티나 페론당)로 비판하는 시각도 있지만, 자원추출 중심 경제를 극복하기 위해 부유국가들에 기후위기의 책임을 묻고 있는 브라질의 룰라 정권을 위시한 좌파정부의 움직임은 브라질 민중과 전세계 기후정의를 외치는 시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다.
한편 정권의 민주성은 환경정책과도 연관성이 있는데, 호주에 본부를 둔 경제평화연구소(IPE)의 환경위기 보고서에 의하면 권위주의국가인 중국 인도 러시아에서는 기후위기 관심도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사회적 복원력이 떨어지는 이러한 국가들에서 사회갈등이 깊어지고 있는 상황이고 특히 이 보고서에서는 남미 베네주엘라처럼 환경문제와 국내분쟁 이슈가 연결되어있는 국가의 경우도 그렇고 전세계적으로 평화와 갈등, 기후위기와 생태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각주8)
브라질 원주민 지역 야노마미(Yanomami) 마을의 채굴 현장. © 치코 바타타 / 그린피스 (그린피스 웹사이트)
[세계 민주인권을 보는 8개의 시선]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벌어지는 '민주주의와 인권 위기'을 목도하며 8명의 필자가 고민과 성찰을 나눕니다.
글 : 정순영 (Social Link Service Lab #SLSL 슬슬 대표, 자유연구가)
* 해당 원고의 의견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민주인권기념관의 공식 의견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각주1. - 추출주의 (Extractivism): 세계 시장에 판매하기 위해 지구에서 천연 자원을 추출하는 과정이다. 주로 전 세계적으로 수출에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천연 자원의 추출 또는 제거에 의존하는 경제에서 발생한다.
- 추출경제 : 종속이론에 기반해 잉여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 의해 저발전국으로부터 추출된다고 보는 경제론. 천연자원은 물론 자본마저도 끊임없이 추출해 부의 집중을 가져가는 현재의 경제 시스템을 일컬음.
- 종속이론 : 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3...
심화 참고 : ‘어떻게 추출(extractive) 경제에서 생성(generative) 경제로 나아갈 것인가?’
(저자 : David Bollier, 원문 : “How to Move from an Extractive to a Generative Economy?” (2017.2.2) /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ce)
각주2. '핑크 타이드'(분홍색 물결)에 대해서는 https://en.wikipedia.org/wiki/Pink_tide 등을 참조.
각주3. https://overseas.mofa.go.kr/br-ko/brd/m_6112/view.do?seq=1345956
각주4. https://brunch.co.kr/@hsk4243/83
각주5. http://klsi.org/bbs/board.php?bo_table=B07&wr_id=1109
각주6. 중남미와 깐부 되기: https://m.hankookilbo.com/News/Read/A2022012110120003144?rPrev=A2022032510540005517
각주7. 원주민 권리 옹호 - ‘라틴아메리카원주민 인권'' 2005: http://www.ajlas.org/v2006/paper/2005vol18no304.pdf
‘1980년대 이래 원주민 개념정의는 사회적 성격보다는 인종적 성격에 보다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이러한 개념 규정에 따르면 원 . 주민을 분류하는 특징으로 공동의 지리적 기원 신체적 특징 언어, 종교 관습 민속 음식 정치사회조직 공동경작지 등을 들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 전체 5억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게는 6% 많게는 9% 정도이고 인구수 로 보면 3천만에서 4천 5백만 정도로 추정된다.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은 19세기 20세기 두 세기에 걸친 지속적인 원주민 말살정책과 통합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심지어 80년대까지 감소세였던 원주민의 수가 최근에는 오히려 점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원주민은 역사적으로 가장 빈곤하고 가장 소외 된 사회계층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토지 언어 문화 통치형태와 같은 기본적 권리에서 뿐만 아니라 교육이나 보건 상하수도 등등의 사회적 서비스에서도 심한 차별을 겪어왔다. 원주민들은 제 2의 계 급으로서 경제적 교육적 기회조차도 박탈당했다. 특히 신자유주의가 사회복지에 있어서 탈중앙집권주의를 적용함 에 따라 원주민들의 소외는 보다 심화되었다. 그나마 포퓰리즘 체제하에서 주어졌던 최소한의 사회복지마저도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는 여지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자유주의 개인주의에 따라 원주민 공동체의 공동 소유 토지가 개인에게 분배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원주민들의 개별 소유 토지가 상업적 작물을 재배하기 위한 토지집중 과정을 용이롭게 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원주민의 공동경작 토지를 보호하기 위한 토지의 집합적 소유권 인정이 원주민 인권의 가장 중요한 이슈중 하나로 등장했다.’
‘원주민들의 정치적 대표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원주민 운동 단체들에 의해 제기되는 것이 바로 자치성의 개념이다. 1970년대 원주민 운동이 출현한 이래 원주민 조직들은 지속적으로 국제법에 기반을 둔 자결권(self-determination) 을 요구하고 있다. 원주민운동의 리더들은 소수권(minority rights) 에 기초를 둔 다양한 요구들이 자결권의 요구와 상반되는 통합정책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요구는 소수권이 아닌 자결권 자치권이라고 주장한다.’
각주8. https://www.visionofhumanity.org/wp-content/uploads/2022/10/ETR-2022-Web-V1.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