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소식

세계의 민주주의증인 - 2021년 미얀마, 그리고 1980년 광주 | 소중한

쿠데타(coup d'État). 무력으로 정권을 빼앗는 일

1988년에 태어난 내겐 아무래도 생경한 단어다. 쿠데타는 교과서나 책에서 접하던 과거사였고, 가끔 뉴스로 접하던 먼 나라 이야기였다.

2021년 2월 1일도 그랬다. 출근하며 뉴스를 훑어보던 중 '미얀마', '군부', '쿠데타'라는 단어가 무심히 눈에 들어왔다. 엄연한 현실임에도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2021년 대명천지에 이런 일이.' 이 생각만 머릿속에서 맴돌 뿐 멀리 떨어진 공간의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피 흘리는 시민들의 소식이 언론에 켜켜이 쌓여갔다. 소셜미디어엔 평화와 민주주의를 담은 염원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미얀마에 주목했다. 그러나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그만큼 관심은 점점 줄어갔다. '기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도 없다니.' 무력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쿠데타는 다시 먼 나라 이야기가 돼버리던 중이었다.


쿠데타 후 20일쯤 흘렀을까. 광주에서 사진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세이브미얀마(#SaveMyanmar)'란 제목의 사진전이었다. 쿠데타 후 한국에서 열리는 첫 사진전의 장소가 하필 또 광주의 '메이홀(Mayhall)'이었다. 사진전 첫날인 2월 22일 현장을 찾았다. 뭉게구름과 농토 사이의 긴 지평선. 시민과 군경 사이의 긴 바리케이드 라인. 두 개의 선이 관통하는 각각의 사진이 위아래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지평선을 따라 밀짚모자를 쓴 시민들은 한없이 평화로웠다. 바리케이드를 마주한 노란 헬멧을 쓴 시민들은 그저 위태로웠다. 쿠데타 전후의 미얀마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진들이었다.


사진전을 준비한 황정아 광주아시아여성네트워크 대표 활동가와 김옥열 작가를 만났다. 두 사람은 아래와 같이 말했다.

황정아 "지금 군부 쿠데타에 의한 저항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서라도 도울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다 사진전을 준비하게 됐다."
김옥열 "광주도 5.18 때 똑같은 일을 겪었다. 당시엔 통신이 발달하지 못해 외국에 알리는 게 힘들었지만 지금 미얀마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 Myanmar Pressphoto Agency


사진 한 장

2020년과 2021년. 각 새해의 첫머리에 나는 외국인들을 찾고 있었다. 2020년엔 사진 한 장, 2021년엔 문건 하나에서 시작된 작업이었다. 2020년 초에 5.18 사진, 특히 국군보안사령부 사진첩 속 사진(2019년 11월 공개)을 훑어보던 중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외국인 한 명을 발견했다. 이 외국인은 한국인 4명과 함께 환자가 누워있는 들것을 들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그는 어쩌다 금남로 한복판을 지나게 됐을까. 어쩌다 이 사진에 담겼을까.' 사진 한 장과 이 질문을 시작으로 오마이뉴스 기획 <5.18 40주년 특집 - 이방인의 증언>이 나올 수 있었다.

사진 속 인물은 1954년생 미국 미네소타대학 출신 팀 원버그(Tim Warnberg)였다. 그는 '원덕기'라는 한국 이름도 갖고 있었다. 자신의 성 '원버그'에서 딴 것이었다. 평화봉사단(Peace Corps) 자격으로 광주에 와 있던 원버그는 '1980년 5월 광주'를 생생히 목격했다.

평화봉사단은 1961년 미국 정부가 만든 청년 봉사단체다. 단원들은 개발도상국에 파견돼 주로 교육, 의료, 농수산 분야의 기술을 전파했다. 파견 국가에서 미국의 존재감을 높이기 위한 의도도 이 제도에 담겨 있었다. 한국엔 15년 동안(1966~1981년) 평화봉사단이 머물렀다.

원버그도 그중 한 명이었다. 광주에서 근무했던 원버그는 능숙한 젓가락질로 매운 비빔냉면을 잘 먹던, 충장로우체국 앞 음악감상실에서 밥 딜런(Bob Dylan)의 노래를 신청하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5.18을 마주한 원버그는 더 이상 평범할 수 없었다. 그는 계엄군의 구타를 말리고 환자를 후송했으며 외신기자의 통역까지 도맡았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인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도 그중 한 명이다.


ⓒ Myanmar Pressphoto Agency


원버그뿐만이 아니었다. 취재 과정에서 5.18을 목격하고 이를 널리 알린 평화봉사단원이 더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데이비드 돌린저(David Dolinger), 폴 코트라이트(Paul Courtright), 스티븐 클라크 헌지커(Steven Clark Hunziker), 캐롤린 투르비필(Carolyn Turbyfill). 원버그과 함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긴 취재 끝에 이들 중 대부분과 연락이 닿았다. 연락이 닿지 않은 일부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들의 행동은 1980년 5월에 그치지 않았다. 원버그는 199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꾸준히 활동했다. 특히 1987년 하와이대학 한국학 전문잡지 <Korean Studies>에 논문 <The Kwangju Uprising: An Inside View>를 싣기도 했다. 이 논문은 외국에서 최초로 5.18을 다룬 논문이었다. 논문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그들(신군부)은 상처뿐인 승리를 거둔 것일지도 모른다. 한나 아렌트는 '권력을 폭력으로 대신하면 승리를 가져다줄 수도 있지만 그 대가는 크다. 패배자뿐만 아니라 승리자 또한 자신의 권력 때문에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번역 : 최용주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의 조사1과장)


영국과 미국에 살고 있는 돌린저와 코트라이트 역시 지금껏 5.18을 가슴에 품고 있다. 이들은 최근에도 회고록을 냈다. 코트라이트는 2020년 <5.18 푸른 눈의 증인 (Witnessing Gwangju)>, 돌린저는 2022년 <나의 이름은 임대운 (Called by another name)>을 통해 증인으로서의 삶을 이어가는 중이다.


5.18 당시 대구에 있던 헌지커와 투르비필은 돌린저로부터 여러 자료를 전달받았다. 두 사람은 돌린저가 직접 찍은 사진과 광주시민들이 만든 성명서를 들고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에서 적절한 언론을 찾지 못한 이들은 스웨덴까지 이동해 1980년 7월 중순 스톡홀름발 AFP통신, AP통신의 기사를 끌어냈다.


이전에도 5.18을 보도한 외신들은 여럿 있었지만 이 기사들은 특히 신군부의 부당한 권력 찬탈과 잔혹성을 적나라하게 보도했다. 한국 외무부(현 외교부)와 주한미대사관은 물론,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중앙정보부의 후신이자 국가정보원의 전신)까지 두 사람을 추적하고 나설 정도였다. 헌지커는 2014년에 세상을 떠났고 투르비필은 미국에 살고 있다.


ⓒ Myanmar Pressphoto Agency


문건 하나

2021년 초엔 '합동수사본부장(전두환)' 직인이 박힌 문건에서 외국인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1980년 7월 15일 생산된 이 문건엔 합동수사본부가 프랑스인 콜렛 누아르(Coletee Noir)를 조사해야 하니 외무부에 '수사 협조를 의뢰'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실제론 '의뢰'가 아닌 '명령'이었다. 외국인 조사가 외교 문제로 불거지지 않도록 잘 처리하라는 지시를 내린 셈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5.18 41주년 특별기획 - 두 여성의 5월>에 담았다.


5.18 전후로 수사기관의 조사, 특히 합동수사본부의 소환조사 대상에 오른 외국인은 누아르가 유일하다. 실제로 누아르는 두 차례나 '서빙고(국군보안사령부 분실)'로 끌려가 거짓말탐지기까지 동원한 조사를 받았다. 그에게 씌워진 혐의는 '포고령 위반'이었다. 아래는 문건에 적힌 내용 중 일부다.


"(누아르는) 1980년 5월 29일 명동 소재 문방구점에서 노동문제상담소 정마리안나(41세)와 같이 광주사태에 대한 '어느 목격자의 증언'이란 유언비어 원고를 2부 복사해 그중 1부를 광주에서 상경한 김성용 신부에게 전달함. 이로써 1980년 5월 30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모임에서 40여 명의 신부에게 유언비어를 전파하게 함."

"1980년 6월 3일 명동 소재 전진상교육관에서 정마리안나로부터 '어느 목격자의 증언' 내용을 녹음한 카세트테이프 1개를 받아 일본 (가톨릭) 정의평회위원회(정의평화협의회의 잘못 - 글쓴이 주) 간부인 송 모에게 송달함. 이로써 그 내용이 일본 각 신문에 인용보도됨으로써 국제적인 물의를 야기함."


'유언비어'란 말 빼곤 모두 진실이었다. AFI(당시 국제가톨릭여자협조회, 현 국제가톨릭형제회) 소속이었던 누아르는 1962년 한국을 찾았다. 2016년까지 한국에 머물렀던 그는 독재정권 시절의 엄혹함을 하나하나 목격했다. 프랑스에 살고 있는 그와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었다. "1934년 개띠"라고 자신을 소개한 누아르는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왜 알리려고 했나요"라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많은 사람이) 알아야만 했거든요. 그래야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죠. 광주에서 벌어진 일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어요. 전두환의 군인들이 광주에 들어가 사람들을 죽였어요. 하지만 TV, 라디오, 신문에선 (사실과) 다른 이야기만 나왔어요."


누아르의 행동은 천주교 사제들의 용기로 이어졌다.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단뿐만 아니라 13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전국·서울·청주·인천·원주·춘천·수원·마산·안동·부산·전주·광주·수도회)이 잇따라 성명을 내놨다. 이들은 5.18의 원인을 신군부의 잔혹함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비상계엄 해제, 구속된 시민·학생 석방 등을 강하게 요구했다. 당시로선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일본에선 기자회견이 이어졌다. 일본 천주교계는 누아르가 전한 자료를 토대로 성명을 발표했고 이 내용이 도쿄발 AFP(6월 8일), 아사히신문(6월 6일 3면), 도쿄신문(6월 6일 5면)에 보도됐다. 한국 외무부가 즉각 반박 성명을 낼 정도로 이는 큰 파장을 일으켰고 결국 신부 6명(김성용·오태순·양홍·김택암·안충석·장덕필)과 정마리안나(정양숙)는 서빙고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합동수사본부가 누아르를 조사한 것도 이 때문이다.


ⓒ Myanmar Pressphoto Agency


그들은 왜, 우리는 무엇을

다시 미얀마 사진전 이야기다. 전시관에 걸린 사진 대부분은 미얀마 현지 기자 모임인 MPA(Myanmar Pressphoto Agency)가 찍은 것이었다. 그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걱정이 앞섰다. 사진전을 주관한 광주아시아여성네트워크를 통해 MPA 관계자와 연락할 수 있었다.


미얀마 기자들은 폐간, 해직, 체포, 고문 피해의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MPA와 몇 차례 화상회의를 열어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그들이 가장 목말라하는 건 '보도'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하고 기사를 써도 이를 보도할 곳이 없었다. 경제적 어려움 또한 마냥 가볍게 여길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미얀마 기자다 - 위기의 저널리즘 복원 프로젝트>는 이를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시작했다.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글의 첫머리에 이렇게 썼다.


"(미얀마 군부 쿠데타는) 정통성 없는 이들이 권력을 움켜쥐었던 과거 우리의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감시자들과 기록자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습니다. 미얀마의 기자들은 '부끄럽고 싶지 않다'며 군부의 통제를 뚫고 취재와 기사 쓰기를 이어가는 중입니다. 쿠데타 이후 6개월, 오마이뉴스는 이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프로젝트의 기본 방향은 미얀마 기자들이 현지에서 직접 취재한 기사를 한국어와 미얀마어로 동시에 보도하는 것이었다. 더해 그들의 기사에 공감하는 이들로부터 '원고료'를 받기로 했다. 프로젝트를 통해 약 7개월 간(2021년 8월 19일~2022년 3월 17일) 기사 26개를 한국어·미얀마어로 보도했고 수많은 시민이 원고료 2,102만 원으로 연대의 마음을 보내줬다. 제이 파잉(J Paing) 편집장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진 하나하나, 영상 하나하나가 쿠데타 세력이 저지른 불의의 증거입니다. 이를 보고도 기록하지 않는다면 우린 평생을 부끄러움 속에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자로서 소명을 다하기 위해 설령 위험으로 가득한 현장이라도 우린 가야 합니다. 모든 것을 기록해야 합니다. 또 시민들에게 진실을 전해야 합니다. 전 세계에 미얀마 상황을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세대가 민주주의 투쟁의 역사를 알 수 있게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두 차례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먼저 누아르의 이야기를 담은 기획 <두 여성의 5월>이 2021년 8월 제11회 5.18언론상(5.18기념재단·광주전남기자협회)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상금 전액을 프로젝트에 기부하기로 했다. 그때 남겼던 글 중 일부다.


"국가폭력을 마주한 시민들에게 해외에서의 연대활동은 너무도 간절한 소망이자, 희망의 끈과 같은 존재입니다. 1980년 광주를 위해서도 콜렛 누아르, 미국 평화봉사단 단원들을 포함한 수많은 외국인이 국내외에서 움직였고, 이는 결국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됐습니다. 1980년 광주가 그랬듯, 2021년 미얀마도 해외의 연대를 절실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반가운 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찾아왔다. 이 프로젝트가 2021년 11월 제31회 민주언론상(전국언론노조) 활동부문 특별상으로 선정됐다는 소식이었다. 전국언론노조는 수상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전국언론노조 강령 '우리는 전 세계 노동자가 모두 하나라는 인식 아래 국제연대운동을 실천하고 전쟁을 반대하며 항구적 세계평화실현을 위해 노력한다'를 그대로 비춘 듯한 움직임입니다. 두 손 번쩍 들고 뜨거운 찬사를 보냅니다. 해직과 고문에 흔들리는 미얀마 언론인과 한국 시민이 한 덩어리로 이어져 있음을 알게 했습니다. 미얀마에 민주주의와 민주언론 체계가 바로 설 때까지 더욱 힘내주실 것을 알기에 이 상을 드립니다."


시간은 대체로 권력의 편이다. 시간은 필연적으로 망각을 낳고 망각은 자연스레 권력의 민낯을 지운다. 그 과정에서 증인이 설 자리는 좁아지고 연대의 끈은 느슨해진다. 곧이어 자라난 냉소는 절망을 낳고 절망은 진화를 거부한다.


증인의 삶은 쉽지 않다. 의도치 않게 서게 된 그 자리에서 의도적으로 침묵하든 증언하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침묵도 증언도 증인을 괴롭히긴 마찬가지지만 특히 증언엔 더욱 용기가 필요하다. 증언의 상대가 권력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 원버그는 왜 그랬을까. 데이비드 돌린저는 왜 그랬을까. 폴 코트라이트는 왜 그랬을까. 스티븐 클라크 헌지커는 왜 그랬을까. 캐롤린 투르비필은 왜 그랬을까. 콜렛 누아르는 왜 그랬을까. 광주, 더 나아가 한국의 어둠을 목격한 전 세계 시민들은 왜 그랬을까.


미얀마, 더 나아가 세계 곳곳의 참상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 Myanmar Pressphoto Agency


[세계 민주인권을 보는 8개의 시선]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벌어지는 '민주주의와 인권 위기'를 목도하며 8명의 필자가 고민과 성찰을 나눕니다.

글 : 소중한 오마이뉴스 기자, 2021년 <나는 미얀마 기자다 - 위기의 저널리즘 복원 프로젝트> 기획

* 해당 원고의 의견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민주인권기념관의 공식 의견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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