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응급실에서 일한다. 의사로서 응급실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진료한다. 진료실로 들어오면 병원에 온 이유를 묻는다. 불편하고 아픈 곳을 말하면 그에 대한 질문을 몇 개 던져 진단을 좁힌다. 신체 검진을 하고 혈액과 영상 검사를 하면 대부분의 진단명이 나온다. 그에 맞게 정해진 약을 주고 치료 방침을 설명하면 진료가 마무리된다. 하루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과정을 거친다. 내 업무는 그들의 호소 증상을 과학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모든 매뉴얼은 교과서와 지침에 적혀 있기에 내 주관은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나는 의학적 지침을 수행하는 직업인으로 기능한다.
교과서와 매뉴얼대로 의학적 지침을 수행하는 직업인, 의사
진료실의 프로세스는 일견 단순하다. 인간의 고통은 규격에 들어가 전산화된다. 차트는 몇 마디의 문장으로 고통을 설명하고 동일한 진단명으로 그들을 엮는다. 이것이 현대 의학이 환자를 가장 효율적, 과학적으로 진료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진료가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의학이 인체의 고통을 분석해서 파악하고 체계화하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와 노력이 있었다. 또 교과서와 지침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학문이 포함된 이론적 배경이 필요했다. 의사가 되기 위한 교육은 사실상 그들을 암기하고 익히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
나 또한 힘겹게 많은 지식을 암기하고 진료실 책상에 앉았다. 응급실은 의학의 일반적 소견이 적용되는 곳이었다. 많은 환자를 마주하고 지침이 숙달되자 나는 무난히 자신의 일을 해내는 의사가 되었다. 몇 마디 대화로 진단을 내리고 차트를 작성하고 환자의 불편을 과학적으로 해결하는 일을 어느덧 십오 년째 해오고 있다. 이 사회에서 내가 맡은 일은 오직 한 공간, 응급실의 일이다. 그리고 여기서 깨달을 수밖에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학생 때 매몰되었던 교과서와 진료 지침과 반복적인 서류상의 일을 벗어나는 것이다.
응급실의 환자는 조금 특수하다. 일단 이곳에 오고 싶은 사람은 단연코 없다. 여기는 장기적인 건강의 증진이나 질병의 관리를 위해서 오는 곳도 아니다. 지금 당장 고통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만이 찾아오는 곳이다. 그러면 진료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거꾸로 생각할 수도 있다. 지금 이 주위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중 누가 오늘 밤 응급실에 찾아올 것이고, 그 사람은 나를 왜 찾아와야 했는가.
양부모가 십육 개월 아이를 오랜 시간을 두고 육체적으로 학대해서 심정지가 발생한 사건이 있다. 나는 심폐소생술을 하고 의학적으로 소생 가능성이 없어 사망을 선언했다. 그리고 차트에 "외인사, 다발성 골절, 복강 내 출혈, 사망"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내 일은 거기서 끝인가?
빚에 시달리던 가장은 손목을 그었다. 나는 "손목의 열상"이라고 쓰고 상처를 꿰맸다. 그는 집에 돌아가 다시 목을 매달았다. 나는 "우울증 의증, 교사로 인한 외인사."라고 썼다. 한 환자는 심한 복통을 참다가 간신히 실려와 위암을 진단받았다. 치료를 권했지만 돈이 없다고 한사코 집에 갔다. 나는 차트에 "위암, 환자의 거부로 치료하지 못함."이라고 썼다. 이 단순한 진단명이 내 소감의 전부여야 하는가. 내 공식적인 업무는 진짜 여기까지인가.
고시원에서 한 사내가 의식을 잃고 발견되었다. 당뇨와 굶주림 때문이라 금방 회복되었지만 고시원 주인은 그의 짐을 모두 들고 왔다. 고시원비가 밀려서 더 이상 그곳은 그의 거처가 아니라고 했다. 나는 하여간 치료가 끝났으니 차트에 "당뇨, 저혈당, 삼일 후 외래 재방문."이라고 적는다. 한 노동자는 작업 발판이 흔들려 추락했고, 하필 바닥에 날카로운 철골이 있었다. 동료는 사지 중 일부를 가지고 왔지만 붙이기에는 어려운 형태였다. 나는 차트에 "사지 절단, 접합 불가능."을 쓰고 재활 치료로 안내했다.
사회의 가장 취약한 면을 보여주는 축약판, 응급실
여기서 나는 사회의 구성과 실제 인간의 존재 사이에서 멀미를 느낀다. 개인의 문제는 사회적 취약점과 하나하나 연결된다. 늘어가는 고독사, OECD 1위를 결코 내주지 않는 자살 문제, 전염병으로 인한 고립, 타인에 대한 폭력과 아동 학대, 사람을 죄는 빈곤, 불의의 사고가 모두 극단적인 형태로 이곳을 찾아온다. 이들은 진단명이기 전에 인간이다. 너무나 분명하고도 명백히 이들은 사람이고, 이렇듯 응급실은 사회의 가장 취약한 면을 보여주는 축약판이다.
나는 민주인권을 위해 노력해 온 국가의 의사다. 그 형태는 사회보장제도와 건강보험으로 나타난다. 현재 우리가 구축한 사회는 다수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역사적으로 노력한 결과물이다. 어디서든 119를 누르면 최대한 빠른 시간에 인명을 구하는 구급차가 달려온다. 또 112를 누르면 공권력이 달려와 법에 기반한 판단을 한다. 전 국민에게 건강보험이 가입되어 있으며, 취약 계층이나 중증 질환자에게는 병원비를 파격적으로 할인해 준다. 설령 신분증이 없거나 보험이 없어도 병원에서 경제적 이유로 환자를 거부하는 일은 없다.
그동안 나는 사회의 도움을 받아 다양한 취약 계층의 필수 진료를 비용 없이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회보장 시스템에 있어 대한민국보다 더 인도적인 체계를 갖춘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는 모두가 투쟁해서 얻어낸 결과물이자 사회가 도출한 합의점이다. 덕분에 국민은 소득의 일정 부분을 세금과 건강보험으로 지출하고, 각자 사회적 재분배를 달성한다. 우리는 이론상 더 나은 인간의 기본권에 대해서 합의한 상태다.
그럼에도 나는 진정한 민주인권 달성을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아득하다고 확신한다. 당장 주위를 둘러보라. 주변의 모든 이웃이 민주적으로 자신의 인권을 누리며 주어진 생까지 건강하게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는가. 동일한 건강보험을 가지고 있으니 모두가 걱정 없이 대우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직도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발견되고, 누군가는 폭력의 피해자가 되고, 누군가는 위험한 환경에서 노동하고, 누군가는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고 있다.
민주인권은 기계적인 평등과는 다르다. 모두가 자유 의지를 누리고 삶의 권리를 보장받으며 괴롭지 않게 제 생을 끝까지 영위하는 것이 응급실을 지키는 의사가 주장할 수 있는 인권이다. 또 이곳을 찾아오는 고통스럽고 슬픈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이 오직 내가 바라는 방향이다. 모두가 이곳에 와보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주위의 소외된 이웃을 돌아볼 수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지금 가능한 민주인권의 첫걸음이다.
글 :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권역응급센터에서 일하며 느낀 것들을 글로 적고 있다. 『만약은 없다』 등을 썼다.
* 해당 원고의 의견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민주인권기념관의 공식 의견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응급실에서 일한다. 의사로서 응급실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진료한다. 진료실로 들어오면 병원에 온 이유를 묻는다. 불편하고 아픈 곳을 말하면 그에 대한 질문을 몇 개 던져 진단을 좁힌다. 신체 검진을 하고 혈액과 영상 검사를 하면 대부분의 진단명이 나온다. 그에 맞게 정해진 약을 주고 치료 방침을 설명하면 진료가 마무리된다. 하루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과정을 거친다. 내 업무는 그들의 호소 증상을 과학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모든 매뉴얼은 교과서와 지침에 적혀 있기에 내 주관은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나는 의학적 지침을 수행하는 직업인으로 기능한다.
교과서와 매뉴얼대로 의학적 지침을 수행하는 직업인, 의사
진료실의 프로세스는 일견 단순하다. 인간의 고통은 규격에 들어가 전산화된다. 차트는 몇 마디의 문장으로 고통을 설명하고 동일한 진단명으로 그들을 엮는다. 이것이 현대 의학이 환자를 가장 효율적, 과학적으로 진료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진료가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의학이 인체의 고통을 분석해서 파악하고 체계화하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와 노력이 있었다. 또 교과서와 지침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학문이 포함된 이론적 배경이 필요했다. 의사가 되기 위한 교육은 사실상 그들을 암기하고 익히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
나 또한 힘겹게 많은 지식을 암기하고 진료실 책상에 앉았다. 응급실은 의학의 일반적 소견이 적용되는 곳이었다. 많은 환자를 마주하고 지침이 숙달되자 나는 무난히 자신의 일을 해내는 의사가 되었다. 몇 마디 대화로 진단을 내리고 차트를 작성하고 환자의 불편을 과학적으로 해결하는 일을 어느덧 십오 년째 해오고 있다. 이 사회에서 내가 맡은 일은 오직 한 공간, 응급실의 일이다. 그리고 여기서 깨달을 수밖에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학생 때 매몰되었던 교과서와 진료 지침과 반복적인 서류상의 일을 벗어나는 것이다.
응급실의 환자는 조금 특수하다. 일단 이곳에 오고 싶은 사람은 단연코 없다. 여기는 장기적인 건강의 증진이나 질병의 관리를 위해서 오는 곳도 아니다. 지금 당장 고통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만이 찾아오는 곳이다. 그러면 진료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거꾸로 생각할 수도 있다. 지금 이 주위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중 누가 오늘 밤 응급실에 찾아올 것이고, 그 사람은 나를 왜 찾아와야 했는가.
양부모가 십육 개월 아이를 오랜 시간을 두고 육체적으로 학대해서 심정지가 발생한 사건이 있다. 나는 심폐소생술을 하고 의학적으로 소생 가능성이 없어 사망을 선언했다. 그리고 차트에 "외인사, 다발성 골절, 복강 내 출혈, 사망"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내 일은 거기서 끝인가?
빚에 시달리던 가장은 손목을 그었다. 나는 "손목의 열상"이라고 쓰고 상처를 꿰맸다. 그는 집에 돌아가 다시 목을 매달았다. 나는 "우울증 의증, 교사로 인한 외인사."라고 썼다. 한 환자는 심한 복통을 참다가 간신히 실려와 위암을 진단받았다. 치료를 권했지만 돈이 없다고 한사코 집에 갔다. 나는 차트에 "위암, 환자의 거부로 치료하지 못함."이라고 썼다. 이 단순한 진단명이 내 소감의 전부여야 하는가. 내 공식적인 업무는 진짜 여기까지인가.
고시원에서 한 사내가 의식을 잃고 발견되었다. 당뇨와 굶주림 때문이라 금방 회복되었지만 고시원 주인은 그의 짐을 모두 들고 왔다. 고시원비가 밀려서 더 이상 그곳은 그의 거처가 아니라고 했다. 나는 하여간 치료가 끝났으니 차트에 "당뇨, 저혈당, 삼일 후 외래 재방문."이라고 적는다. 한 노동자는 작업 발판이 흔들려 추락했고, 하필 바닥에 날카로운 철골이 있었다. 동료는 사지 중 일부를 가지고 왔지만 붙이기에는 어려운 형태였다. 나는 차트에 "사지 절단, 접합 불가능."을 쓰고 재활 치료로 안내했다.
사회의 가장 취약한 면을 보여주는 축약판, 응급실
여기서 나는 사회의 구성과 실제 인간의 존재 사이에서 멀미를 느낀다. 개인의 문제는 사회적 취약점과 하나하나 연결된다. 늘어가는 고독사, OECD 1위를 결코 내주지 않는 자살 문제, 전염병으로 인한 고립, 타인에 대한 폭력과 아동 학대, 사람을 죄는 빈곤, 불의의 사고가 모두 극단적인 형태로 이곳을 찾아온다. 이들은 진단명이기 전에 인간이다. 너무나 분명하고도 명백히 이들은 사람이고, 이렇듯 응급실은 사회의 가장 취약한 면을 보여주는 축약판이다.
나는 민주인권을 위해 노력해 온 국가의 의사다. 그 형태는 사회보장제도와 건강보험으로 나타난다. 현재 우리가 구축한 사회는 다수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역사적으로 노력한 결과물이다. 어디서든 119를 누르면 최대한 빠른 시간에 인명을 구하는 구급차가 달려온다. 또 112를 누르면 공권력이 달려와 법에 기반한 판단을 한다. 전 국민에게 건강보험이 가입되어 있으며, 취약 계층이나 중증 질환자에게는 병원비를 파격적으로 할인해 준다. 설령 신분증이 없거나 보험이 없어도 병원에서 경제적 이유로 환자를 거부하는 일은 없다.
그동안 나는 사회의 도움을 받아 다양한 취약 계층의 필수 진료를 비용 없이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회보장 시스템에 있어 대한민국보다 더 인도적인 체계를 갖춘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는 모두가 투쟁해서 얻어낸 결과물이자 사회가 도출한 합의점이다. 덕분에 국민은 소득의 일정 부분을 세금과 건강보험으로 지출하고, 각자 사회적 재분배를 달성한다. 우리는 이론상 더 나은 인간의 기본권에 대해서 합의한 상태다.
그럼에도 나는 진정한 민주인권 달성을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아득하다고 확신한다. 당장 주위를 둘러보라. 주변의 모든 이웃이 민주적으로 자신의 인권을 누리며 주어진 생까지 건강하게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는가. 동일한 건강보험을 가지고 있으니 모두가 걱정 없이 대우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직도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발견되고, 누군가는 폭력의 피해자가 되고, 누군가는 위험한 환경에서 노동하고, 누군가는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고 있다.
민주인권은 기계적인 평등과는 다르다. 모두가 자유 의지를 누리고 삶의 권리를 보장받으며 괴롭지 않게 제 생을 끝까지 영위하는 것이 응급실을 지키는 의사가 주장할 수 있는 인권이다. 또 이곳을 찾아오는 고통스럽고 슬픈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이 오직 내가 바라는 방향이다. 모두가 이곳에 와보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주위의 소외된 이웃을 돌아볼 수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지금 가능한 민주인권의 첫걸음이다.
글 :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권역응급센터에서 일하며 느낀 것들을 글로 적고 있다. 『만약은 없다』 등을 썼다.
* 해당 원고의 의견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민주인권기념관의 공식 의견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