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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월동 98-8번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흔히 남영동 대공분실로 불리는 이 건물은 1976년 10월 지상 5층 규모로 지어졌고,1983년 위로 2개 층이 증축되어 7층 건물이 되었다. 정초석에는 당시 내부무 장관 김치열의 이름이, 분실동 정문 앞 동판에는 이곳에서 고문사한 박종철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치안본부는 지금의 경찰청 전신으로 당시 내무부 소속이었다.

건축 당시 간판에 새겨진 이름은 ‘국제해양연구소’였다. 서울 한복판, 지하철 1호선 남영역과 담장을 맞대고 있는 이곳이 생사를 넘나드는 폭력과 협박, 물고문과 전기고문이 일상처럼 반복되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오가는 사람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잘 가꾼 정원에서는 사계절 꽃이 피고, 테니스장에서는 끔찍한 고문을 자행하던 수사관들이 체력단련을 위해 테니스를 쳤다. 아무도 모르게 끌려와 모진 고문을 당하던 피해자들은 무심히 오가는 전철 소리를 들으며 끝없는 공포 속에서 처절한 무력감과 싸워야 했다. 


1층 입구

철문

한밤중에 눈이 가려진 채 차에 실려 끌려온 사람들은 극심한 공포에 휩싸여 정문을 통과했다. 육중한 철문은 기계장치로 움직였으며 이중으로 입구를 보호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금속음과 탱크 소리 같은 것이 들려서 군부대로 끌려왔다고 짐작하곤 했다. 역방향으로 설계된 연행자 전용 출입문은 정문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외부에 그 용도가 전혀 드러나지 않도록 설계된 것이다. 연행자 전용 출입문은 나선형 철제 계단으로 연결되고, 이 계단은 오직 조사실이 있는 5층으로만 이어진다. 그러나 눈이 가려진 채 끌려간 이들은 자신이 몇 층으로 가는지 짐작조차 못 했다. 철제 계단의 소리는 공포를 증폭시키고, 나선형 계단은 공간감을 상실하게 만든다. 이 때문에 고문피해자의 일부는 자신이 지하로 끌려갔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연행되어 온 사람들은 연행되는 순간부터 남영동 대공분실 조사실에 이르기까지 눈을 가리고 이동을 했다. 차를 타고 이곳으로 오면 먼저 정문을 통해 들어오게 된다. 정문을 살펴보면 검은색 철문과 안쪽의 두꺼운 철문이 이중으로 되어 있다. 당시 남영동 대공분실에 잡혀왔던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대공분실에 들어설 때 문소리가 탱크가 지나가는 소리처럼 들렸고, 이에 큰 공포감을 느꼈다” 라고 한다. 조사실로 가기 전부터 공포가 시작되는 것이다.


분실동 건물 후면

건물 정면에 출입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물 뒤편에 출입문을 따로 만들어 두었다. 건물 뒤편 쪽문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역방향으로 설계되었다. 건물 뒤편의 외벽을 올려다보면, 앞면과 달리 창문들이 전부 좁게 설계되어 있었다. 이 건물을 지을 당시 뒤편에 롯데제과 본사 건물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보안을 위해 뒤편 창문을 전부 좁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연행자 출입문

정문 밖에서 볼 때 출입구의 모습이 쉽게 보이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나선형 계단

연행자는 후면 출입문에서 나선형 계단을 통해 곧장 조사실로 올라가게끔 동선이 이어져 있다. 

조사실은 5층에 위치해 있다. 뒷문을 통해 건물에 들어와서 5층으로 이동하는 방법은 2가지였다. 하나는 성인 2-3명만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 또 다른 하나는 나선형 계단이다. 나선형 계단은 5층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5층 조사실 입구

남영동 대공분실의 조사실은 통상 지하에 위치한 여타 조사실들과 달리 지상 5층에 자리 잡고 있다. 15개의 조사실 각각의 문 위에는 층수 없이 호수만 작게 표시되어 있다. 출입구와 조사실 문은 크기와 색이 모두 똑같아서, 설령 조사를 받던 피해자가 뛰쳐나온다 해도 어디로 빠져나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조사실 문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 엇갈리게 배열되어, 문이 열려 있을 때도 건너편 조사실이 보이지 않는다. 단지 비명소리만이 오갔을 것이다.

2000년대 리모델링 되어 원형을 모습은 볼 수 없다. 욕조, 책상, 침대, 세면대 등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구조물도 모두 고문의 도구가 되었다.


5층 조사실 내부

조사실의 모든 상황은 밖에서 통제되었다. 복도에 있는 조광기를 통해 조명의 전원은 물론이고 밝기까지 조절되었다. 문마다 달려 있는 작은 렌즈는 안에서 밖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안을 감시하는 용도이다. 조사실 천장에는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3층 사무실에서 모니터링이 이루어졌다. 벽은 흡음재 역할을 하는 목재 타공판으로 둘러싸여 있다. 천장 위의 형광등은 철조망으로 보호하고, 책상과 의자도 바닥에 단단히 고정해 놓았다. 고문 도중의 돌발행동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밖에서 보면 유독 5층의 창문들만이 좁고 길게 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내부로 들어가면 그 이유가 분명히 드러난다. 고문에 시달리던 피해자들의 탈출이나 자해를 막기 위해, 사람 머리가 빠져나갈 수 없는 너비로 만든 것이다. 고문피해자들은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빛을 보고 창밖으로 오가는 전철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탈출을 할 수도, 소리를 질러 구조를 청할 수도 없었다. 1970년대에 지어졌다고는 상상하기 힘든 정교한 시설들. 그 모든 것이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완벽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514호

514호실과 맞은편 515호실은 다른 조사실에 비해 2배 정도 넓다. 
다른 조사실보다 공간이 큰 이유는 바로 이곳에 칠성판을 설치하여 전기고문을 했기 때문이다.
칠성판은 시신을 눕히기 위해 관 바닥에 까는 얇은 널판지로 ‘칠성판을 지다’ 라는 말은 곧 죽음을 상징한다. 
(이곳에서는 죽음에 가까운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하는 고문도구로 사용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폭력 앞에서 간첩으로 조작되었다. 조사를 받은 사람들은 한결 같이 심한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 잠 안재우기, 밥 굶기기, 물 안주기 등을 받았고, 인간적인 모멸감을 갖게 하는 각종 고문을 경험했다고 증언했다.


515호

515호는 1985년 당시 김근태 선생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전 의장)이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514호와 같이 다른 조사실의 2배정도의 크기다. 2000년대 초반 리모델링 하면서 당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민주주의자 故 김근태 선생 추모전> 근태서재 시 소리 숲 - 남영동 515

남영동 515호에 전시된 근태서재 <시 소리 숲>은 아카이브 설치 작가 이부록이 민주주의자 고 김근태 선생의 서재를 상징적으로 복원한 작업이다. 

서재는 고인의 유품과 수감 중 읽었던 시집 25권, 방음 구멍을 재구성해 인두-점으로 필사한 시의 언어와 어록, 책 자료, 추모전시를 통해 창작된 기억사물, 삶을 기록한 영상 등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조사실 가운데 전시된 파놉티콘을 형상화한 테이블에 ‘칠성판’을 연상시키는 오래된 나무를 배치해 전시하였다. 방음구멍, 문에 달린 감시창 등 원형 구조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상징은 감시와 통제의 개념인 파놉티콘에서 가져왔다. 실제 김근태 선생의 딸인 김병민 큐레이터는 전시를 통해 폭력의 공간에서 추모의 공간, 위로와 치유의 공간, 그리고 빛을 쏘아 올리는 희망을 공간으로 탈바꿈 하고자 하였고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고통의 기억만을 안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추모의 마음, 따스함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아가길 소원한다고 말했다.


1985년 9월 4일 새벽,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은 김근태 선생(민주화운동청년연합 전 의장)을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했다.

김근태 선생은 9월 26일 기소되기까지 23일 동안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기술자로 알려진 이근안 경감에게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다. 이때의 고문으로 김근태 선생을 평생을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한다. 9월 27일 아내 인재근은 당시 고문 사실을 세상에 폭로했다.

1987년 김근태, 인재근은 공동으로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상했고 1988년 독일의 함부르크 재단은 김근태를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하였다.

[사료 콘텐츠]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 민주화운동청년연합, 그리고 김근태
[사료 콘텐츠] 어머니들의 수배전단 - 고문경찰 이근안을 잡아라!


509호

5층 조사실 가운데 원형이 보존된 곳은 단 한곳, 509호이다. 3평 남짓한 조사실에는 개방된 양변기와 세면대, 작은 욕조가 설치되어 있고, 그 너머로 침대와 책상, 의자가 놓여 있다.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이 방으로 끌려와 지독한 물고문 끝에 죽임을 당했다. 경찰은 ‘탁’ 하고 책상을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희대의 망언을 남기고 이 사건을 쇼크사로 조작하려 했다. 그러나 진실을 밝히고자 했던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박종철이 고문사했다는 것이 세상에 밝혀지면서 남영동 대공분실의 존재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박종철의 죽음 이후 5층의 다른 조사실은 모두 욕조가 철거되고 붉은색 타일도 교체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1987년 1월 14일. 이곳에서 사망한 박종철 열사는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7년 1월 13일 자신의 하숙집에서 남영동 대공분실 소속 수사관에게 강제 연행되었다. 경찰이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인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그 후배인 박종철 열사를 참고인 자격으로 끌고 왔다. 다음 날 선배인 박종운의 소재를 묻는 질문에 박종철 열사가 계속 답하지 않자 물고문이 시작됐고 결국 박종철 열사는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사료콘텐츠] 박종철의 죽음을 부른 수사계획
[사료콘텐츠] 6810일의 기록, 고 박정기 아버님 일기장


4층 박종철 
기념 전시실

4층 박종철 기념 전시실은 박종철 열사의 유품과 80년대의 시대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사진과 신문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다.


  1980년대 시대배경 해설영상 


정초

남영동 대공분실의 정초석이다. 1976년 남영동 대공분실을 지을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김치열의 이름이 선명하다. 김치열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고등문관 시험과 일본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인물이다. 조선총독부 검사를 지내고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기에는 서울지검장을 지내다 4.19혁명 이후 3.15부정선거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물로 지목되어 직위해제 되고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5.16쿠데타를 지지하면서 재기한 후 1970년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임명되고, 본격적으로 유신체제에 들어서자 화려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출세한 김치열은 1975년 12월 내무부 장관이 되어, 1976년 내무부 산하 치안본부 소속의 남영동 대공분실을 짓는 책임자 역할까지 맡았다.

박정희 정권 시절 이 사람이 승승장구할 때, 어디선가 누군가는 고문에 의해 죽고, 고통 받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 출처: 건축 관련_남영동 대공분실 시설물 기초조사 연구보고서
영상_김희철 / 사진_서영걸, 정택용 / 건축사진_진효숙